형제·처남·사돈까지 제거하며 권력 잡은 태종의 속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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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호의 파워독서‘무더운 여름날에 푹 빠져들 수 있는 역사서.’ 조선의 임금 가운데서 태종 이방원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임금도 드물다. 손에 많은 피를 묻히고 스스로 권력을 만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덕일이 쓴 《조선왕조실록2:정종·태종》(다산초당)은 조선실록이라는 원저에 충실하게 쓴 책이다. 작가의 유려한 필력과 충실한 고증, 그리고 현대적 해석 등이 어우러진 멋진 작품이다.
1·2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 장악
도움 주었던 처남들도 '토사구팽'
권력은 결코 나눠 가질 수 없고
외척의 발호는 일절 허용치 않아
'북벌'이란 천하의 호기 무산시켜
明에 대한 '사대의 길' 단초 해석도
조선왕조실록2:정종·태종
이덕일 / 다산초당
조선의 끝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은 그다지 후하지 않다. 저자는 조선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은 낙후되고 정체된 나라 등으로 묘사된다고 유감을 표한다. 그 원인으로 식민사관의 영향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서평자 입장에서 그런 실상까지 부인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다만 조선 초기 역사에는 역동성과 과감함이 있기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매력이 있다. 특히 태종과 관련된 이야기에는 권력의 본질이나 운용과 관련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이란 거대한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정종과 태종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태종은 다른 배에서 난 형제들인 강씨 소생의 방석과 방번을 제거하는 1차 왕자난에서 이겼다. 2차 왕자 난에서는 동봉 형제들을 제거하는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와 두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 중 여섯 아들 가운데 다섯 번째다. 그는 권력을 쥐는 과정에서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와 그 가족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권력을 쥔 이후 공동창업이란 생각을 가졌던 민씨와 처남들은 화를 면치 못한다.
권력은 결코 나눠 가질 수 없으며 외척의 발호를 일절 허용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던 이방원은 태종 10년 1410년에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을, 그리고 태종 15년에 나머지 두 명의 처남도 제거한다. 그가 처남들을 사형시킨 지 1년이 지난 후 남긴 교지가 조선실록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무릇 집안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논한다면 궁궐 가까이에 외척을 들이는 것은 임금의 원대한 계책이 아니다. 지금은 나라가 평안하여 내외에 걱정할 것이 없지만 외척의 폐단을 잊으면 훗날 다시 발생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인간적인 정리로 보면 사람이 할 일은 아니지만 권력의 생리와 후일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이방원의 야무짐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그는 자신의 최측근인 이숙번조차도 한양에 일절 발을 내딛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훗날 세종의 장인인 심온까지 제거할 정도로 권력 유지에 만전을 꾀한 인물이다.
이런 태종의 기여 가운데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노비법에서 일대 혁신을 꾀한 점이다. 양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부법을 도입해서 노비 수를 줄인 것은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태종은 당시 힘차게 추진되고 있던 북벌이란 천하의 호기를 왕자난으로 무산시키고만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이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길로 들어서는 데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란 것이 저자의 역사 해석이다. 권력의 암투 과정과 조선 개국 초기의 국제 정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한여름의 무더위를 잊게 해주는 대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