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생존과 맞바꾼 인간존엄… '고난의 행군'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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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과 다리의 가격소년은 노동당 간부보다 군인이 되고 싶었다. 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서다. 썩고 병든 남조선 사회가 안타까웠다. 선생님은 말했다. “여러분 나이의 어린이들이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답니다. 너무 굶주리다 보니 쓰레기통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살아요.” 미군이 버리는 음식물 찌꺼기를 얻어 가려고 아이들끼리 싸우기도 한다고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굶주림과 사투를 벌여야 했던 것은 정작 그 소년이었다.
장강명 지음 / 아시아 / 136쪽│1만500원
기자 출신 소설가 장강명이 쓴 논픽션 《팔과 다리의 가격》은 북한인권단체인 나우(NAUH)의 지성호 대표 이야기다. 저자는 1982년 북한의 최북단 함경북도 학포탄광마을에서 태어난 소년의 눈으로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를 회상한다. 당시 대기근을 북한 사람들은 식량 배급이 끊어졌다는 의미로 ‘미공급 시기’라 부른다. 김일성의 항일운동을 가리키는 ‘고난의 행군’에서 따온 이름은 ‘투쟁정신을 본받아 위기를 극복하자’며 북한 당국자들이 붙였다고 한다.책은 아사(餓死)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음식을 먹지 못해 다가오는 죽음은 생소하기만 하다. 지방이 없는 몸이 두 끼를 연속으로 거르면 허기는 통증으로 변한다. 2~3일을 못 먹으면 소화기관은 활동을 멈춘다. 고통을 못 느끼는 상태가 되면 정신이 흐릿해진다. 뼈와 가죽만 남은 몸이 부어오르는 것은 좋지 않은 신호다. 부풀고 가라앉음이 세 번 지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눈앞에 음식이 있어도 먹을 수 없다. 힘겨운 호흡이 잦아들다 결국 멈춘다.
각 가정에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옥수수 배급이 조금씩 늦어지다 완전히 끊긴 것은 1995년이었다. 물물교환의 수단이던 옥수수는 비공식 화폐였기에 배급 중단은 갇혀 있는 사회를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고난의 행군 시기 사망자 수는 지금도 엇갈린다. 한국 정부는 33만 명, 탈북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300만 명이라고 했다.
배고픔은 윤리의식을 둔화시켰고 수치심을 잊게 했다. 소년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겨울 새벽 달리는 열차에 올라타 언 손으로 석탄을 자루에 담았다. 살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석탄을 내어준 기차는 소년의 한쪽 팔과 다리를 가져갔다. 두 동생을 둔 그는 겨우 열네 살이었다.사고 후 회복 과정이나 대기근 이후 가족과의 헤어짐은 자세히 서술하지 않는다. 청년이 된 그가 목발을 짚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 한국까지 온 여정도 담지 않았다. 저자는 ‘수많은 사람이 아무 잘못 없이 굶어 죽은 비극’에 주목했다. “굶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인간의 존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그런 가운데서도 인간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가치를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책이다.
인터뷰를 통해 저자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정도의 생생한 묘사를 끌어냈다. 130쪽 남짓의 비교적 얇은 책이지만 울림은 크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