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포용적 성장에 대한 誤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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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적 성장' 막겠다며 등판시킨 포용적 성장최근 2분기 성장률 잠정치가 나왔다. 전년 동기 대비 2.9% 성장했다. 한편 미국의 2분기 성장률은 연율로 4.1%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한국의 12배(2017년 기준)다. 한국보다 12배 규모가 큰 미국이 한국보다 1.4배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2017년 한국은 3.1% 성장함으로써 선방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세계 성장률 평균(3.7%)에 못 미친 저(低)성장이었다.
'한국만 침체' 방관한 소득주도성장 구하기일 뿐
슬로건으로 현혹하지 말고 시장으로 돌아가야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객원논설위원 dkcho@mju.ac.kr >
최근의 저성장 고착화와 미증유의 경제위기 상황은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그 한가운데에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확신 편향’이 존재한다. 이제는 정책 방향을 바꿀 때가 됐지만 청와대는 꿈쩍도 않고 구태의연한 발언만 쏟아내고 있다. 청와대는 ‘포용적 성장’을 언급하면서 “신자유주의는 성장의 수혜가 소수에 그치고 다수가 배제되는 배제적 성장(exclusive growth)을 유발하지만,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은 성장의 과실이 많은 사람에게 배분돼 두루 혜택을 누린다”고 했다. 정부 개입을 옹호하는 시대착오적 정책 사고는 여전하다.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춘추관 브리핑을 통해 친절하게 용어를 정리해 줬다. 포용적 성장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책이 미사여구의 나열일 수는 없다. 최저임금 인상 논의에 갇힌 ‘소득주도성장 일병(一兵)’을 구하기 위한 차원에서 포용적 성장이 동원된 것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떨칠 수 없다. 폐기해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덧칠하면 ‘정책분식’이 된다.
청와대 주장대로 신자유주의가 배제적 성장을 가져오는가. 시장은 계약을 통해 정보가 교환되고 이해가 조정되는 ‘비인격적’ 플랫폼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누가 다른 누구를 배제할 수 없다. 현실은 반대다. 독점 노조가 원하는 대로 시급을 1만원으로 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임금은 노동의 대가, 즉 기여한 부가가치를 사후적으로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생산성과 연계될 수밖에 없다. 시급이 1만원이면 노동생산성이 1만원 이하인 근로자는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최저임금 인상의 이익은 정규직 전문직 근로자가 배타적으로 누린다. 정부의 간섭과 독점적 노조가 도리어 특정 계층에 ‘배제적 성장’을 가져다준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구제금융 조건으로 ‘고금리’를 내걸었다. 명분은 기업의 구조조정이었다. 고금리로 수많은 기업이 문을 닫자, 우량 기업들을 헐값에 매수하기 위한 술책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대두됐다. 최저임금도 다를 바 없다. 독점 노조에 의해 추동된 최저임금 인상은 미숙련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의 희생을 전제로 한, 정치권력과의 결탁일 수 있다. 기저에는 소위 ‘촛불혁명’에 대한 지분 청구 행위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투자가 성장을 견인한다. 자본이 축적되면 노동생산성이 증가해 임금수준이 향상되고 생산도 증가해 물가가 하락하고 실질임금이 높아진다. 그러면 소비여력이 커져 경제가 성장한다. 그 결과 빈곤이 극복되고 하위층이 중상층으로 이동한다. 물론 중상층이 하위층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복지프로그램이 만들어진 것이다. 국가의 역할은 경쟁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결과에 대해 탈락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장경제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 대런 에스모글루 MIT 교수의 메시지는 성장을 위한 자유·기회·법치 등의 인프라가 갖춰진 ‘포용적 국가’가 역사적으로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포용적 성장’을 기계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이 주장하는 원래의 포용적 성장은 취약 계층에 교육과 훈련을 집중함으로써 그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갖도록 유도하자는 것이다.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국가가 줘야 한다는 것으로, 특정 계층에 특혜를 주겠다는 것이 아니다.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을 끌어올리는 방향, 원칙, 기조에는 흔들림이 없다”는 청와대의 언명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소득주도성장이 포용적 성장의 방법이 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