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를 '8가구 8결 토지'로 묶어 생산·공납… 교역 적어 화폐유통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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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인구와 경지
(12) 고려의 농촌경제
고려의 토지는 50만결
가족의 구성원은 대개 5~6명
소규모 가족의 경지는 1결
논농사 생산성, 현재의 50분의 1
쌀은 지배신분의 주식
밭작물의 가치는 쌀의 절반
다수의 서민은 조·수수 등 먹어
10~12세기엔 곡작이 성행
자급적 생존 경제 '벼랑에'
소출의 절반 또는 25% 조세로
화폐 편리함 알았지만 '그림의 떡'
가까운 곳서 물물교환에 그쳐
고려의 인구가 몇 명이나 되는지는 《고려사》에 전하지 않는다. 그런 정보가 고려왕조의 실록에 있었다면 15세기 전반에 쓰인 《고려사》의 편찬자들이 놓쳤을 리 없다. 456년이나 지속한 왕조가 인구에 관한 정보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신기한 일이다. 고려왕조가 원(元)제국에 복속했을 때의 일이다. 원 황제가 고려 사신에게 고려의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보고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며 다그쳤다. 궁지에 몰린 고려 사신이 재치 있게 되묻기를 머리털과도 같이 많은 사람의 수를 어찌 헤아릴 수 있느냐고 했다. 그러자 황제가 웃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전한다. 고려가 인구정보를 국가의 1급 비밀이라서 숨기기 위해 벌인 촌극은 아니었다. 바칠 만한 장부와 통계 자체가 없었다.이후 고려는 원의 지시에 따라 중국식으로 인구조사를 강행했지만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고려왕조는 끝내 백성의 총수에 관한 정보를 남기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원이 1345년 편찬한 《송사(宋史)》에 고려의 인구가 210만 명이란 기사가 전한다. 아마도 위와 같은 경과로 원이 알게 된 대강의 수가 아닐까 여겨진다. 이에 근거해 고려사 연구를 대표하는 박용운 교수는 원이 고려를 침공하기 이전인 12세기의 인구를 250만∼300만 명으로 추산했다.토지와 생산성
고려왕조의 토지에 대한 정보는 왕조가 문을 닫기 4년 전인 1388년의 것이 겨우 전한다. 이에 의하면 전국의 경지는 총 50만 결(結)이었다. 1결의 면적은 대략 1헥타르(ha)였다. 소규모 가족의 경지는 보통 1결이었다. 12세기의 인구가 250만∼300만 명이고, 소규모 가족의 구성원이 5∼6명이면, 소규모 가족의 총수는 50만이어서 전국의 경지가 50만 결로 추산되는데, 묘하게도 1388년의 정보와 일치한다. 이런 관계에서 12세기 고려의 인구와 경지를 250만∼300만 명과 50만 결로 어림잡을 수 있다. 참고로 1910년의 인구와 토지를 소개하면, 1600만 명과 430만ha다. 경제사를 연구함에는 이 같은 거시 지표를 전제하면서 각 시대를 상상할 필요가 있다. 불확실하다고 아무런 상상을 하지 않으면 엉뚱한 환상이 그를 대신하고 만다.토지의 생산성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992년에 제정된 조세 수취 규정에서 발견된다. 당시 토지는 1년1작, 2년1작, 3년1작의 세 등급으로 구분됐다. 경작 기간과 회수를 고려한 논 1결의 연평균 생산성은 벼 12.5석이었다. 자세한 계산 과정을 생략하고 2015년 논농사 생산성과 비교하면 50분의 1 수준이다. 농사라고는 하지만 토지가 제공하는 작물 생육의 에너지를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휴한농법(休閑農法)의 단계였다. 지력을 인공으로 보충하는 비료의 사용은 알지 못하는 시대였다.
식료
조세의 품목이 벼라고 해서 쌀이 고려인의 주식이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쌀은 소수 지배 신분의 주식이었으며, 다수 서민의 주식은 조·수수 등 밭작물이었다. 조세가 쌀로 수취된 것은 지배 신분의 주식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밭의 조세도 쌀로 거뒀는데 마찬가지 목적에서였다. 밭작물의 가치는 쌀의 절반으로 평가됐다. 예컨대 콩 2석을 낼 것을 벼 1석으로 대신했다. 1024년 불국사는 지진으로 훼손된 석가탑을 수리했다. 그때 불국사 내외의 승(僧) 80여 명이 각종 곡물과 기물을 시주했다. 곡물은 쌀, 밀, 메밀, 콩, 팥, 완두 등 도합 29석8승이었다. 그 가운데 쌀은 6석9두8승으로 23%에 불과했다. 80여 명 가운데는 왕조로부터 수조지(收租地)를 받는 대덕(大德)이 11명 있었는데, 쌀을 시주한 사람은 주로 그들이었다. 여기서도 쌀은 상층의 귀족·관료가 아니고서는 일상적으로 섭취하는 식료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말 신라촌장적의 시대에 비해 인구가 2∼3배나 증가한 시대였다. 그 사이 8∼9세기에는 인공관개가 발달하고 대형 쟁기가 보급되는 등 일종의 농업혁명이 일었다. 여전히 낮은 수준의 농법이지만 고려 농촌의 생태환경은 많이 달라졌다. 1145년 고려왕조는 전답으로 일구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잡종지에 뽕나무, 밤나무, 옻나무, 닥나무를 심도록 명했다. 달리 말해 개간할 만한 토지는 이미 거의 개간된 상태였다. 이로부터 뽕나무 숲이 무성했던 7세기 말의 생태환경과는 크게 달라진, 산업의 중심이 현저히 곡작 농업으로 이동한 10∼12세기 고려의 농촌경제를 상상할 수 있다.
시장과 화폐고려의 백성은 농업 소출의 절반 또는 4분의 1을 조세로 상납했다. 이외에 비단, 마포, 실, 인삼 등 지역 특산물을 공물로 바쳤다. 철과 소금을 바치는 촌이 있었다. 소(所)라고 했는데, 전국에 대략 270군데였다. 이런 연고로 고려인들은 자급적 생존경제의 벼랑에 놓였다. 그에 관해 송의 서긍(徐兢)은 주요 생산물이 거의 다 조세와 공물로 들어가 상인들은 멀리 다니지 않고 하루 거리의 도시로 가서 있고 없는 것을 바꾸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기록했다. 시장이라고 해 봐야 관아가 놓인 읍저(邑底)에서 부정기적으로 열리는 장시에 불과했으며, 교역의 형태는 대개 물물교환이었다.
1097년 고려는 주전관(鑄錢官)을 두어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비로소 화폐의 편리함을 알게 됐다고 한다. 1101년에는 은 1근(斤)으로 활구(闊口)라 불린 은병(銀甁)을 만들어 보급했다. 이듬해에는 최초로 동전을 주조했는데, 해동통보(海東通寶)라 했다. 그때 개경의 좌우에 주점을 설치해 화폐 사용의 편리함을 일으켰다. 농촌경제의 사정은 달랐다. 농촌에도 주점을 세워 동전의 유통을 장려했으나 실패했다. 고려의 농촌에서 교역은 화폐를 필요로 할 만큼 규모가 크거나 일상적이지 않았다.
정호
고려의 농민은 정호(丁戶)라 불린 세대복합체로 존재했다. 대개 8가의 소규모 세대와 8결의 경지가 결합한 친족공동체를 말했다. 그에 관해서는 제7회 연재에서 몇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한 가지를 추가로 소개한다. 1319년 고려는 사심관(事審官) 제도를 폐지하고 사심관이 불법으로 끌어모은 인구와 토지를 색출했다. 사심관이란 지방 출신으로서 귀족·관료로 출세한 사람을 중앙정부와의 소통을 돕기 위해 해당 군현의 자문관으로 임명한 것을 말한다. 조사 결과 2360호와 1만9798결의 토지가 사심관에 포섭된 것으로 드러났다. 호당 8.4결이었다.
고려의 가족은 그 구성원리가 중국과 달랐다. 고려가 원에 복속할 때 끝까지 저항하다가 원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는 원에 일찍 투항한 사람들의 가속(家屬)이 포함됐다. 고려는 그들의 송환을 요청했다. 원은 일찍 투항한 사람들의 부모, 처, 자녀를 돌려줬다. 그러자 고려는 형제, 자매, 할아버지, 손자, 시아버지도 가속이므로 그들마저 돌려주기를 요청했다. 그렇게 고려의 가속은 중국과 달리 방계와 처부모를 포함하는 복합적 구성이었다. 지난 연재에서 지적한 대로 고려의 친족은 부계, 모계, 처계의 3변으로 열린 조직이었다. 그 부분집합인 가속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가속이라 하지만 단일의 세대는 아니었다. 생산과 공납을 위해 소규모 세대 여덟이 결합한 복합체였다. 고려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그 세대복합체를 정호로 편성하고 백성 지배체제의 기초단위로 삼았다.
백정과 양수척모든 사람이 다 정호에 속하지는 않았다. 친족을 결여하고 토지가 조금뿐인 세대가 있었는데, 백정(白丁)이라 했다. 백(白)은 없다는 뜻이다. 곧 정을 보유하지 않은 하층 농민이 백정이었다. 그들은 품팔이하는 처지이지만 천한 신분은 아니었다. 어떻든 정호와 백정은 고려의 백성으로서 호적에 등록됐다. 그에 비해 양수척(楊水尺)이란 집단이 있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사냥과 고리짝 만들기를 생업으로 하는 집단이었다. 고려는 양수척을 이류(異類)로, 곧 다른 종족으로 간주했다. 1216년 거란이 침입하자 양수척은 고려를 배반하고 거란의 길 안내를 맡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세종은 이들의 이동을 금하고 강제로 정착시켰다. 그러고선 신백정(新白丁)으로 불렀다. 그 수효가 적지 않아 전라도 남원의 경우 전체 인구의 4분지 1에 달했다. 이후 신백정은 노비 인구가 증가하는 소굴을 이뤘다. 고려왕조는 우리가 생각해 온 만큼 균질적으로 통합된 사회가 아니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