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민주주의 뿌리는 다름을 수용하는 '자비'와 '경청'하는 마음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13) 선의(善意)
이탈리아 화가 산치오 라파엘로(1483~1520)의 ‘세 자비의 여신들’(1504, 유화, 17×17㎝). 프랑스 상티이 콩데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자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카리스’를 세 여신으로 표현했다. 알라이아(광채), 에우프로시네(기쁨), 탈리아(쾌활)로 불리는 이들은 그리스 신화와 종교에서 지하세계에 거주하며 망자를 심판하는 ‘분노의 여신들’이자 ‘자비의 여신들’이다. 비극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등장한다.
오이디푸스는 인간이 상상할 수는 있지만 도덕적·관습적으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터부를 지닌 인간이다. 그는 운명의 소용돌이에서 자신도 모른 채 생부인 테베 왕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생모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해 네 명의 자녀를 뒀다.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니케스, 두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가 그들이다. 오이디푸스는 도시라는 공동체가 지탱하기 위한 원칙을 위반(違反)했다. 도시는 가족의 집합이며, 가족은 부모 자녀라는 독립적인 위치와 기능의 집합체다. 가족의 해체는 곧 도시문명의 해체로 이어진다. 가족의 기반을 흔드는 가장 근본적인 해악은 가족 구성원의 경계를 침범하는 폭력(暴力)이다.

터부
가족 내 폭력의 가장 추악한 형태가 바로 ‘근친상간(近親相姦)’이다.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동시에 부인인 이오카스테는 이 끔찍한 사실을 알고 목매달아 자살한다. 자살한 어머니를 본 오이디푸스도 돌아가신 어머니의 옷을 단정하게 여미고 있던 핀을 뽑아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비참한 운명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정신적인 장님이었다. 그는 이성적인 인간으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의 아들이며,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이었다. 오이디푸스는 그를 덮친 운명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조금씩 ‘볼 수 있는’ 지혜로운 인간이 됐다.

운명의 암호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딸이자 동생인 안티고네의 손에 이끌려 터부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아테네가 멀리 보이는 콜로노스라는 동네다. 콜로노스에는 ‘분노의 여신들’에게 바쳐진 거룩한 숲이 있다. 이곳엔 프로메테우스가 거주하고, 포세이돈을 위한 제단이 있다. 분노의 여신들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신들이다. 이들은 죄를 지은 자에게 가혹한 벌을 구형하는 신들이다. 특히 가정과 도시의 근간을 흔드는 ‘근친상간’이란 터부를 범한 자들을 벌한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이 공간을 침범하자 콜로노스 주민들은 불안에 떤다. 이곳은 침범이 허용되지 않는 금지구역이다. 오이디푸스가 이곳에 들어간 이유는 분노의 여신들이 ‘자비의 여신들’일 수 있어서다. 이 여신들은 정의(正義)의 신이면서 동시에 용서(容恕)와 자비(慈悲)의 신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준대로 남을 정죄하고 벌하는 정의는 용서와 자비가 없다면 폭력이다. 반대로 용서와 자비에 정의가 없다면 그것은 방종이 된다.

자비로운 여신들이 인간의 기준으로 상반된 가치를 지닌 존재인 것처럼 오이디푸스의 삶도 저주인 동시에 축복이 될 수 있다. 아테네로 가는 길목에 있는 콜로노스에서 다시 저주를 받아 추방될 위기에 처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반전시킨다. 그는 자신이 침입한 낯선 장소가 “자신의 운명의 암호”라고 확신한다. 그는 자신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 있게 분노의 여신들에게 요구한다. “그분들이 탄원자를 자비롭게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제 여기 이 자리를 절대로 뜨지 않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행한 삶에 얽혀 있는 실타래와 같은 암호를 새로운 문명의 구축을 위해 풀기 시작한다.

‘탄원(歎願)’이란 한 사회의 통념이나 관습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숙고할 뿐만 아니라 그 해결책을 마련하도록 요구하는 행위다. 오이디푸스는 자신과 같이 금기시된 인간을 아테네라는 도시문명의 언저리인 콜로노스 안으로 수용하라고 요구한다. 그는 장님이며 허약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콜로노스 공동체를 정신적으로 오염시킬 수 있는 ‘위험(危險)’이다. 그는 기존 사회가 정한 도덕과 윤리의 범위를 허물기를 요구한다. 오이디푸스는 아테네로 가는 길목에 있는 ‘청동’으로 만든 문턱에 서 있다.자비(慈悲)

콜로노스 주민들은 오이디푸스의 거주 여부가 아테네 왕 테세우스에게 달려 있다고 말한다. 오이디푸스는 직접 테세우스를 만나 자신이 왜 콜로노스에 있어야 하는지 설득하겠다고 말한다. 콜로노스 주민들은 비참한 몰골의 오이디푸스를 동정해 테세우스를 소환하러 전령을 보낸다. 그들은 오이디푸스와의 대화를 통해 특별한 감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오이디푸스의 따님이여, 우리는 그대의 불행에도, 그대 아버지의 불행에도 ‘자비’를 느낍니다. 하지만 신들의 심판이 두려워 우리는 이미 한 말 이외에 더할 말이 없습니다. 그대들은 이곳을 서둘러 떠나시오.”(254~257행) 그들은 비록 사회규범에는 위반되지만 인간의 마음속 깊이 숨겨진 자비를 발견한다.

‘자비’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카리스(charis)’다. 카리스는 상대방의 처지를 깊이 공감할 때 자신도 모르게 심연에서 움트는 감정이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바로 자비다. 자비는 상대방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간절히 원하는 것, 상대방이 사랑하는 것을 만끽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이다. 자비는 또한 상대방의 비극적인 상황에 함께 눈물을 흘릴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탈출하도록 노력하는 수고다. 콜로노스 주민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 자비라는 감정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아직 이성을 근거로 만들어진 사회규범을 위반하기를 두려워한다.새로운 도시문명의 규범

오이디푸스는 아테네가 달성해야 하는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는 콜로노스 주민들에게 호소한다. “도시라는 평판이나 명성이 헛되이 흘러가 버리기만 한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말합니다. ‘아테네는 신을 가장 두려워하는 도시가 되기를. 이 도시만이 핍박받는 이방인들을 보호해줄 수 있고, 이 도시만이 그런 사람을 기꺼이 돕는다.’”(258~262행) 아테네는 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다른 도시들과 구별된다. 신을 두려워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절기에 따라 신전으로 몰려가 제물을 바치는 거대한 의례를 행하는 것인가? 오이디푸스는 신을 두려워하는 행위를 단호하게 설명한다. 신을 두려워한다는 의미는 ‘핍박받는 이방인들을 보호해주는 것’이다.

‘이방인’에 해당하는 그리스 단어 ‘크세노스(xenos)’는 한 도시에 거주하는 사회의 소외계층을 총칭하는 단어다. 크세노스에는 해당 도시에서 법의 보호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외국인과 과부, 고아, 장애인들을 포함한다. 당시 다른 도시들은 왕정으로 상징되는 순혈주의와 편파주의, 혈연과 지연이 장악하는 폐쇄적인 장소였다. 그러나 새로 태어날 도시문명의 상징인 아테네는 이방인을 보호하는, 이방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도시가 돼야 한다. 작가 소포클레스는 이 비극을 보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묻는다. “아테네에 그런 자비가 있습니까?”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그런 ‘이방인’의 상징으로 여겨, 아테네가 자신을 수용하는지를 시험한다. 오이디푸스는 테베라는 도시에서 온 이방인일 뿐만 아니라, 여느 인간과는 전혀 다른 터부 그 자체다. 그는 오히려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신성하고 경건하고, 이곳 시민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자로 왔습니다.”(287~288행) 그는 콜로노스 주민들에게 그들이 상상하지도 못한 ‘다름’을 수용할 수 있는지 묻는다.

경박(輕薄)하지 않은 말

콜로노스 주민들의 대표가 말한다. “노인장, 그대가 방금 말한 그 생각들을 우리는 존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생각들이 경박하지 않은 말로 표현됐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이 나라의 왕께서 판단하시는 것으로 나는 만족하겠습니다.” 콜로노스 주민들은 스스로 설득당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항을, 그 내용의 도덕적이거나 실용적인 판단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들이 스스로 설득당한 것은 오이디푸스가 그들을 설득하는 방식, 즉 ‘경박하지 않은 말을 이용한 주장’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 가진 편견이 그것을 악으로 만들기도 하고, 선으로 만들기도 한다. ‘경박하지 않은 말’이란 상대방의 의견이 자신과 아무리 다르다고 할지라도 선의(善意)를 가지고 경청(敬聽)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반응이다. 오이디푸스가 처한 비극적인 삶은, 그에 관한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선과 악의 굴레를 넘어선다. 아테네가 구축하려는 민주주의는 다름을 수용하는 ‘자비’와 그것을 끝까지 ‘경청’하려는 마음, 그리고 다름을 ‘경박하지 않은 말’로 표현하려는 ‘절제’에서 탄생했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