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약사 기득권에 '의료혁신' 발묶여… 원격의료 19년째 '헛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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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혁신 없인 미래 없다미국 헬스케어기업 박스터는 지난 3월 만성콩팥병 환자들이 집에서 투석을 받을 수 있는 자동복막투석기를 국내에 출시했다. 잠자는 동안 투석을 받으면 노폐물 제거 등의 치료 결과를 클라우드에 저장해 자동으로 의료진에게 보내고 필요시 원격으로 투석기의 치료 설정을 변경할 수 있는 최신 기능이 탑재됐다. 그러나 이 기능은 국내에선 무용지물이다. 원격의료가 금지돼 있어서다. 환자들은 매일 투석 정보를 기록해 의사에게 가져가야 한다. 원격의료를 활용한 첨단의료기기들이 나오고 있지만 혜택을 보지 못하는 사례다.
(2) 원격의료 허용
발목 잡힌 의료 서비스
美, 6건 중 1건이 원격의료
日, 건강보험도 적용하는데 한국은 시범사업만 진행 중
편의점 약 확대도 지지부진
안경은 스스로 만든 규제로 보호는커녕 경쟁력만 잃어
IT·의료 인프라 앞서 있어도 의료계 반대로 성장판 막혀
◆19년째 진전 없는 원격의료의사-환자 간 원격의료는 정부가 2000년 첫 시범사업을 시작한 이후 19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의료법 34조에 따라 의사와 의사 간 원격진료만 허용된다. 의사와 환자 간 원격의료는 섬이나 산골마을, 군부대 등 의료 취약지에서만 시범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은 원격의료가 정착됐다. 미국은 전체 진료 6건 중 1건이 원격으로 이뤄지고 있다. 일본은 의사-환자 간 원격의료를 전면 허용했고 지난 4월부터 건강보험도 적용하고 있다. 뒤늦게 뛰어든 중국도 정부 주도 아래 적극적으로 디지털 의료산업을 육성하고 있다.원격의료 금지로 피해를 보는 건 국민이다. 원격의료는 입원비, 간병비용 감소 등 국민 건강 증진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원격의료 허용과 투자개방형 병원 설립 등을 통해 최대 37만 개의 새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전망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원격의료 이용률이 인구의 20%로 확대되면 2조원 규모의 신규 시장이 생길 것으로 보고 있다.
◆약사에 발목잡힌 편의점약 확대원격의료가 겉돌고 있는 것은 의료계의 직역 이기주의 탓이다. 약계에는 편의점 상비약이 그렇다. 2012년 안전상비의약품제도 도입으로 편의점에서 의약품 판매가 가능해졌다. 현행 약사법상 안전상비약은 의사 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매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 중 20개 내에서 정할 수 있다. 지금까지 편의점 판매가 허용된 안전상비약은 감기약 2종류, 해열진통제 5종류, 소화제 4종류, 파스 2종류 등 13종이다. 속쓰림약(제산제), 설사약(지사제), 화상연고, 항히스타민제 등은 약국에서만 살 수 있다.해외에서는 이 같은 의약품을 약국이 아닌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미국은 대형마트나 슈퍼에서 판매하는 일반의약품이 3만여 개가 넘는다. 영국은 50여 개 성분의 의약품을, 일본은 1만2000여 개 일반약을 약국 이외의 곳에서 판매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온라인에서도 의약품을 구매할 수 있다. 정부는 작년 1월부터 제산제와 지사제를 편의점 상비약에 포함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1년8개월째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약사들이 약물 오·남용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어서다.
◆판로 막혀 中에 밀린 안경산업규제는 영세 산업을 보호해 성장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경쟁을 막아 발전을 저해하기도 한다. 전국 655개 업체의 90% 이상이 10인 미만 사업장인 안경산업이 대표적이다.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 12조5항은 도수가 들어간 안경 또는 콘택트렌즈를 온라인으로 팔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안경테나 선글라스만 가능하다.
정부는 2014년 안경과 콘택트렌즈의 인터넷 판매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대한안경사협회가 반대해 무산됐다. 그 사이 중국 저가 안경테 제조업체들이 물밀듯 치고 들어왔고 국내 업체 상당수가 도산 위기에 내몰렸다.
미국 안경업체 와비파커는 온라인으로 고른 안경 5개를 배송해준 뒤 마음에 드는 1개 제품을 제외하고 반송받는 방식을 선보여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업계 관계자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규제가 국내 안경테 제조사들의 경쟁력을 갉아먹었다”며 “한국판 와비파커가 나오려면 규제 철폐가 우선”이라고 말했다.
전예진/김기만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