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호박잎 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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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녀 <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중앙대 교수 sung-nyo@hanmail.net >오늘은 연중 가장 덥다는 삼복의 끝인 말복이다. ‘복(伏)’자에 ‘엎드린다’는 뜻이 있어 사람이 더위에 지쳐 엎드릴 정도로 더운 날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입추를 지나야 말복인데 입추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더워도 너무 덥다.
입맛이 없어 동생들과 여름 별미를 찾아서 걷는 길에 빨간 벽돌집 담 밑의 호박잎이 눈에 들어왔다. 더위에 시든 먼지투성이의 큰 잎들 사이로 손바닥 크기의 건강한 잎을 따며 아는 척을 했다. “노지에 있는 잎은 너무 질기고 따갑기 때문에 이런 작은 잎이 쌈 싸먹기 좋고 부드러워.”신이 나서 몇 장 따고 있는데 길 가던 여자가 한마디 했다. “따지 마세요. 주인 있어요.” 주인이 있는 줄 몰랐다고 사과하니 못마땅한 듯 쳐다보다 혀를 차고 갔다. 사람 손길을 전혀 받지 못한 호박잎 같았는데 너무 무안했다. 꼭 서리하다 들킨 기분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서리’란 장난으로 남의 과일이나 곡식, 가축 따위를 훔쳐 먹는 풍습을 말한다. ‘장난’이란 이름 아래 ‘정’으로 용서받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농민을 애타게 하는 농산물 절도가 기승을 부려 법적 처벌을 받는 도둑질로 간주된다.
이상하게도 갑자기 식욕이 생기며 호박잎 쌈이 먹고 싶어졌다. 어렸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음식이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최고로 좋아하는 음식이 바로 호박잎 쌈인데 잊고 있었던 것이다.부랴부랴 호박잎을 사다가 겉껍질을 벗겨낸 뒤 깨끗이 씻어 솥에 살짝 찐다. 너무 찌면 축 늘어져 촉감이 좋지 않고 맛도 없어진다. 호박잎은 비타민이 풍부한 반면 단백질이 부족하므로 궁합이 잘 맞는 강된장과 함께 먹는 것이 제맛이다.
집집마다 강된장 레시피가 다르다. 요즘 인기 있는 ‘수미네 반찬’ 강된장은 초호화판으로 반건조 오징어, 소라, 멸치, 밴댕이, 보리새우 등을 넣어 영양과 맛이 최고일 것 같지만 재료도 없고 시간도 줄일 겸 아주 간단한 강된장을 끓여봤다. 손질한 멸치를 잘게 부숴 들기름에 살짝 볶다가 양파와 호박을 썰어 넣고 된장과 마늘을 넣은 뒤 센 불에 후루룩 끓여냈다.
호박잎에 식은 밥을 놓고 강된장을 얹어 쌈을 싸서 입에 넣으니 더위도 잊히는 꿀맛이 입안에 감돈다. 섬유소가 풍부하고 열량도 낮아 다이어트에도 좋은 이 건강식을 잊고 여름 보양식만 찾아다닌 내가 바보 같았다.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값지고 귀한 것들을 잊고 사는 것 같다. 어떤 진수성찬보다도 맛있고, 나에게 일상에서의 행복을 일깨워준 여름 별미 호박잎 쌈밥을 많은 분에게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