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초과학 인프라 개방·공동연구 활성화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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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팔로어'에서 '퍼스트무버'로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은 과학의 발전을 ‘낡은 패러다임의 교체 과정’으로 설명했다. 과학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한 시대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새롭게 바뀌면서 진화한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천동설을 대체하면서 근대 과학혁명이 본격화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쿤의 이런 설명 방식이 학문의 세계에서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 사회를 움직이는 제도와 정책 영역에서도 패러다임 교체가 발전을 추동하는 일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R&D 패러다임 전환기 맞은 한국
지식사업화·대중화에도 속도 내야
김두철 < 기초과학연구원 원장 >
기초과학연구원(IBS) 설립 배경도 ‘패러다임 교체’와 관련이 깊다. IBS는 기초과학 분야 연구자의 장기적·안정적 연구를 지원하고자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 사업으로 2011년 설립됐다. 산업화 시대에는 ‘패스트팔로어(선진국 따라잡기)’가 성장 전략이었다. IBS 임무는 이를 지식기반사회의 ‘퍼스트무버(글로벌 선도국가)’ 전략으로 바꾸는 것이다.IBS는 연구자에게 전권을 주는 장기적·안정적 지원, 석학과 전문가들이 동료 연구자를 평가하는 피어리뷰(peer review), 연구자들이 한곳에 모여 협력하는 집단연구 등 선진 시스템을 국내에 이식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런 노력의 결과 최근 네이처 인덱스 순위, 피인용 상위 1% 논문 비중 등의 질적 지표에서 우수한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설립 8년차를 맞은 올해는 IBS가 한 단계 더 도약하는 시점이 될 것이다. 오랜 숙원이던 본원이 1단계 완공됐다. ‘IBS 2차 5개년 계획(2018~2022년)’도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이는 그동안 지속해온 연구개발(R&D) 패러다임 전환을 한층 더 구체화한 것이다.
IBS 2차 5개년 계획의 핵심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IBS 본연의 ‘전인미답형 연구’ 강화다. IBS에 남들이 다 하는 연구는 의미가 없다. 자연, 우주, 물질, 생명 등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답해 우리 R&D의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 IBS가 지향하는 연구다. 한계돌파를 위해서는 개인연구보다는 대형·집단연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수 연구집단의 참여를 늘리고,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두 번째는 본원의 활성화다. 본원에서는 기초과학 기반 분야와 융·복합 분야 연구단을 전략적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5인 내외의 젊은 연구자들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연구단 모델을 도입할 계획이다. 건설 중인 중이온가속기 외에 다학제 융합연구를 위한 이미징센터, 빅데이터 기반 기초연구를 위한 슈퍼컴퓨터센터를 구축해 뒷받침할 예정이다.
세 번째는 개방과 협력의 확대다. 외부 연구자, 기업가, 일반인 등 누구나 각자의 목적에 맞게 IBS를 활용할 수 있는 채널을 마련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학연교수 등의 개방형 연구직을 확대하고, 보유 인프라를 개방해 공동연구를 활성화할 것이다. 또 기술사업화센터를 매개로 지식사업화를 촉진하며, 과학문화센터를 과학 대중화와 과학·인문·예술 융합의 장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IBS의 이런 비전은 정부 R&D 정책기조와 궤를 같이한다.
쿤이 말했듯 과학의 역사에서 패러다임 교체는 다양한 갈등과 설득의 과정을 수반했다. 많은 과학자들이 탐구와 실험은 물론 현실의 제약을 넘어서려는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뚜렷한 비전을 두 눈에 담되, 흔들림 없이 한 발 한 발 내딛는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