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사랑은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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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32
성명기 < 여의시스템 대표·이노비즈협회장 smk@yoisys.com >“오늘따라 표정이 왜 그래요?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네요.”
예전에 자주 가던 식당에 조선족 아주머니가 있었다. 한국에서 대리운전, 공사판 막노동 등 젊은 여성으로선 쉽지 않은 일까지 했던 맹렬 여성이었다. 늘 웃음을 잃지 않던 아주머니가 어느 날 어두운 표정으로 음식을 나르기에 사정을 물어봤다.그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비밀을 알게 됐다. 한국에서 조선족 남자와 동거하며 아기가 생겼는데, 중국 국적의 남녀 사이에 동거로 생긴 아기는 무국적자 신분이 된다는 것이었다. 학교에도 보낼 수 없고 의료보험 같은 복지혜택도 받을 수 없다. 설상가상 동거하던 남자가 중국으로 가면서 혼자 애를 키우느라 힘든 삶에 내몰렸다. 어느 날 공사판에서 일하던 홀아비 한국 남자의 구애에 아주머니는 혼인신고를 조건으로 동거하게 됐다. 아들에게 국적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그와 아들은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아들에 대해 싫은 내색을 하면서 툭하면 중국 외할머니에게 보내라는 얘기를 하더란다. 아주머니에게 아들은 그 어떤 보물보다 소중했기에 남편 대신 아들을 택했고,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다시 혼자가 돼 힘든 삶이 시작됐지만 그동안 모은 돈으로 다세대 반지하방을 전세로 얻었고, 그곳에서 아들과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연립주택 전체가 경매로 넘어가면서 전세금을 몽땅 날리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입주할 때 전세 등기 제도를 잘 몰랐던 것이 화근이었다.이야기를 듣고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기에 고민만 하다가 며칠 뒤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판사님께 탄원서를 한번 냅시다. 대한민국은 서민들의 아픔을 들어줄 겁니다. 일부라도 건질지 몰라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강압에 가까운 나의 독려로 아주머니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얼마 후 그는 다시 고민을 털어놨다. “재판정에서 진술하라고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를 토닥이며 사정을 차근차근 얘기하면 길이 보일 거라고 조언했다.
꽤 오랜 날이 지난 뒤 아주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전세 돈 모두 찾았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재판정에서 딱한 사정을 말하며 눈물로 애원했다고 했다. 나중에 판사가 채권은행 담당자를 불러 설득했고, 채권은행이 동의해 후순위인 그의 전세보증금을 선변제해줘 돈을 돌려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경험은 내 삶에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기억이 됐다. 다시 ‘행복’을 찾은 아주머니의 아들이 군복무를 마친 뒤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