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게임] "선의의 경쟁 제대로 해낸 본길·상욱이, 제가 봐도 멋있죠"

펜싱 남자 사브르 2회 연속 '집안싸움' 결승전 만든 유상주 코치
"본길이가 끝나고 상욱이를 먼저 챙겼어요.'단체전에서 내가 해줄 테니 믿어'라면서. 이 녀석들이 저를 빼고 자기들끼리 이런 드라마를 찍다니… 멋있더라고요.

하하."
한국 남자 사브르 선수들을 이끄는 유상주(50) 코치는 펜싱 대표팀의 '분위기 메이커'다.

한창 진행 중인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경기장에서 종목 관계없이 가장 큰 목소리로 응원하는 이가 유 코치다.2년 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에페 결승에서 박상영(23·울산광역시청)이 기적 같은 역전극을 펼치기 전 되뇌던 '할 수 있다'의 시초가 바로 유 코치의 외침이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일화다.

"선수들이 다 고생하니 목이 찢어져도 해야죠. 우리 선수들이 '기 좀 그만 빼시라'고 할 정도예요.

오늘은 경기 끝나고 300개 넘는 메시지를 받았는데, 축하한다는 얘기 외엔 '중계방송에 네 목소리밖에 안 들리더라'는 말뿐이더라고요."
직접 지도하는 선수의 경기에서도 코치석에 앉은 그의 목소리는 장내에 쩌렁쩌렁 울린다.

그런데 20일 자카르타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남자 사브르 개인전 결승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았다.

제자 구본길(29·국민체육진흥공단)과 오상욱(22·대전대)이 금메달을 두고 맞붙었기 때문이다.
개인전 3연패에 도전하는 구본길, 우승하면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오상욱 중 누구 편도 들 수 없었다.

"난 누가 우승해도 좋다.

둘 다 중요한 것이 걸렸으니 선의의 경쟁, 악쓰고 하라"고만 한 채 멀찍이 뒤편 의자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피스트 옆 어느 한쪽 코치석엔 앉을 수 없으니 "일부러 그랬다"고 했다.

구본길과 오상욱은 그의 말대로 '악을 쓰고' 양보 없는 명승부를 펼쳤다.

선후배의 '훈훈함'은 잠시 접어두고 승부사의 대결만 있었다.

14-14에서 마지막 한 점이 구본길에게 가면서 접전은 막을 내렸다.

누가 점수를 내도 크게 반응하지 못하던 유 코치의 얼굴엔 그제야 미소가 돌아왔다.

이기고도 후배 생각에 편치 않은 마음을 드러낸 구본길을 보며 유 코치는 "어른이 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도 선수에게 배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시안게임에서 개인전 동메달 1개, 단체전 은메달 2개를 획득했으나 금메달은 없던 유 코치는 지도자로 사브르 최강국을 만들었다.

2002년 부산 대회에 첫 도입된 여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이신미가 우승할 때 뒷받침 역할을 했고, 2014년 인천에서는 구본길-김정환(35·국민체육진흥공단)의 남자 개인전 결승 맞대결과 12년 만의 남자 단체전 우승을 일궈냈다.

리우 올림픽에서 여자팀을 지도한 유 코치가 돌아온 뒤 남자 대표팀은 구본길, 김정환에 신예 오상욱, 김준호(24·국군체육부대)가 호흡을 맞춰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 사상 첫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고, 지난달엔 2연패에 성공했다.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 경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독여 힘이 되어준다는 게 유 코치에 대한 선수들의 설명이다.

오상욱이 준결승전에서 끌려다닐 때는 "포기하지 마. 아직 멀었으니 점수 보지 말고 해"라며 진정시켰다.

오상욱은 역전극으로 구본길과의 결승 대결을 만들어냈다.

훈련과 경기 땐 불호령과 카리스마를 쏟아내지만, 평소엔 남다른 유머 감각으로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도 장점이다.

오상욱의 준결승을 떠올리며 "막말도 좀 해야 하는데 생방송 중이라 어려웠다"고 너스레를 떤 그는 '남자 사브르가 왜 강한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도 평범하게 하지 않았다.

"명장 밑에 약졸이 있겠어요? 선수들 얼굴이 왜 그렇게 잘생겼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데, 사실 식상해요.

저 닮아서 그렇죠."
개인전 '집안싸움'으로 위력을 뽐낸 남자 사브르 대표팀은 23일 단체전에서도 정상을 노린다.

"무조건 금메달"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유 코치는 대회 이후 진짜 목표(?)를 넌지시 던지기도 했다.

"(박)상영이가 리우 올림픽이 끝나고 라면 광고를 찍었는데, 전 양보해서 못 찍었거든요.이번에 잘하고 돌아가면 다시 찍을 기회가 올까요? 하하."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