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대몽골 울루스'에 편입된 고려… 元 통해 대외무역 번성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15) 팍스 몽골리카

자유무역 촉진한 '몽골 울루스'
육·해상 아우른 광대한 교통로
세계 지식·기술·상품 속속 이동
노예폐지·제정 분리 사상도 전파

고려의 모시·인삼, 서역으로
왕실·귀족에 민간도 교역 가세
수도 개경엔 서역인 상당수 거주

元에서 세계관 넓힌 고려 청년들
新유학 무장 새 정치세력 발돋움
대전란의 시대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침입과 고려왕조 28년에 걸친 항쟁은 고려의 사회와 경제에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안겼다. 《고려사》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1254년의 일이다. “이해에 몽골병에 사로잡힌 남녀가 무려 20만6800여 명이요, 살육된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지나가는 주군(州郡)마다 모두 잿더미가 됐으니, 전란이 있은 이래로 이때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결국 1259년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는데, 이후에도 전란은 끊이지 않았다. 1270년 고려 중앙군의 핵심 전력인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 근거지를 진도와 제주도로 옮기면서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 끈질기게 저항했다. 1273년 삼별초의 난이 진압되자 원(元) 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몽골은 일본 정벌에 나섰다.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일본 정벌에서 군수를 조달하고 병사로 동원된 고려 인민의 고통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다.대몽골 울루스

피해가 컸던 만큼 전란 이후 재건된 고려의 사회와 경제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13세기 말 전란의 피해는 거의 복구됐다. 1296년 개경에 1008개 기둥으로 연결된 긴 복도의 시전(市廛)이 다시 세워졌다. 그보다 앞서 1279년에는 원과의 역참로가 개통됐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한반도에서 발칸반도까지, 베트남에서 헝가리까지, 시베리아에서 인도까지의 광활한 유라시아대륙과 지중해에서 인도양을 거쳐 동중국해와 발해만에 이르는 광대한 해원(海原)을 종횡으로 엮는 대(大)몽골 울루스에 깊숙이 포섭됐다. 울루스는 국가 또는 백성이란 뜻이다.
이전의 세계는 7개의 비교적 자급적인 지역으로 구성됐으며, 이슬람이 각 지역을 중개하는 중심부를 이뤘다. 대몽골 울루스 하에서 세계는 최초로 단일의 세계체제로 통합됐다. 제시된 지도는 14세기 유라시아대륙과 바다를 아우른 역참로와 교통로, 해로의 그물망과 곳곳에 들어선 문화 교류의 시설을 보여준다. 대몽골 울루스의 육상과 해상을 아우른 광대한 교역로와 은(銀)본위에 기초한 단일의 통화제도는 세계적 범위의 자유무역을 촉진했다. 이 교역로를 따라 세계 각 지역의 지식, 기술, 상품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돼 각 지역의 전통 사회와 경제에 큰 충격을 줬다.대몽골 울루스의 중심은 원 제국이었다. 원은 광대한 영역을 정치적으로 통합하면서 노예제 폐지, 종교의 자유, 정치와 종교의 분리, 정치의 세속화, 법에 의한 통치, 공공교육과 같은 문명의 원리를 혁신적으로 개발했다. 이것들은 이후 서유럽에서 근대문명의 문을 여는 데 중요한 기틀이 됐다. 중국에서 건너간 컴퍼스, 활자, 종이, 주판 등의 선진기술은 서유럽에서 과학혁명을 촉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원 제국 학자들은 최초의 세계지도를 그렸으며 이란 고대사, 이슬람사, 오구즈사, 중국사, 유대사, 프랑크사, 인도사의 서술로 이뤄진 최초의 세계사를 편찬했다.

왕실 무역

대몽골 울루스를 종횡으로 엮은 세계 무역은 오르탁이라 불린 중앙아시아 무슬림 상인에 의해 주도됐다. 원의 황실과 정부는 오르탁 상인에게 자금을 대여하고 서아시아의 진귀한 보화를 취득했다. 원의 수도에 머문 고려 왕들은 자연스럽게 오르탁 상인들과 접촉했다. 오르탁 상인들이 고려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활짝 열린 국제 환경에서 고려의 대외 무역은 이전 시대가 알지 못한 번영을 누렸다. 고려와 서아시아의 직접적 교역은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의 무역 상대는 원 제국이었다. 원과의 무역은 왕실과 귀족에 의해 주도됐다.1295년 충렬왕은 최초로 관영 교역선을 원에 파견했다. 충렬왕의 왕비로 온 원의 제국대장공주는 고려 인삼을 중국 강남에 수출해 큰 이익을 봤다. 1308년 충선왕은 직염국을 설치해 원이 선호한 고급의 염색 모시를 생산했다. 1309년 개경의 외항인 예성강에서 50척의 관선이 원으로 출항했는데, 주요 화물은 아마도 충선왕이 생산한 모시였을 것이다. 충숙왕은 여러 명의 상인을 고관으로 발탁했는데, 이전에 없는 일이었다. 충숙왕은 중국인과 색목인을 관료로 채용했다. 이 무렵 개경에는 다수의 서역 상인들이 거주했다. 그들과 고려 여인과의 정교를 노래한 쌍화점이란 고려가요는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충혜왕은 궁중의 비를 동원해 모시를 직조하는 대규모 공장을 영위했는데, 한꺼번에 모시 2만 필을 원에 보내기도 했다. 충혜왕 원년에는 무슨 영문인지 이슬람의 무역국인 일칸국의 사절단이 고려를 찾기도 했다.

민간 무역

1323년 중국의 영파를 떠나 남방산 향목(香木)과 2만 점 이상의 자기와 28t의 동전을 싣고 일본으로 가던 200t 규모의 무역선이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1976년 우연히 발굴된 이 무역선은 대몽골 울루스의 질서에서 번성했던 동아시아 해상 교역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2만 점 이상의 자기에는 얼마 되지 않지만 고려 청자도 포함됐다. 고려 왕실만 그 번성한 동아시아 해상 교역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민간 상인도 참가했는데, 그들의 몫은 14세기 말까지 점점 커지는 추세였다.14세기 전반 《노걸대(老乞大)》라는 어학 교습서에 의하면 고려 상인들은 모시와 인삼을 말에 싣고 육로로 요동을 거쳐 원의 대도로 갔다. 대도에는 그들의 친척이 있어서 물화를 판매했다. 상인들은 그 대금으로 산동의 제령부로 내려와 비단, 바늘, 화장품, 장신구 등의 고급 물화를 구입해 배편으로 귀환했다. 그들은 관인무역허가장을 지참했는데, 이외에 상인의 자격이나 수출입 품목의 종류·수량에 특별한 제약이 있던 것 같지는 않다.

14세기 중후반 원명(元明) 교체의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민간 무역은 더욱 번성했다. 주요 수출품은 여전히 모시였다. 권세가들은 그들의 농장에 모시를 재배했으며, 주변의 사원으로 수공업자와 노비를 모아 모시 천을 대량 직조했다. 고려 상인에 관한 《박통사(朴通事)》란 기록에 의하면 한꺼번에 1만 필의 모시를 싣고 중국에 입항하는 고려 상선이 있었다. 고려왕조는 상선이 직접 중국으로 출항하는 것을 금했다. 그 금령이 14세기 중후반이면 사실상 해제된 상태였다. 민간 무역의 번성으로 대도의 외항인 통주 관내 완평현에 고려장(高麗莊)이란 마을이 생겨났다.
목은 이색의 초상화(목은영당본).
역사관이 바뀌다

원 제국으로부터의 충격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원의 고위 관리가 고려에 부임했으며, 제도의 개혁과 새로운 정치를 주도했다. 고려 청년들이 원에 진출해 과거에 급제하고 원의 관리로 출세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세계관으로서 신유학을 신봉하는 지식인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발돋움했다. 1289년 안향(1243∼1306)이 원에서 구한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들고 돌아왔다. 뒤이어 권보(1262∼1346)가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했다.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이제현(1287∼1367)은 원의 수도 연경에서 6년이나 체류했다. 그는 충선왕이 지은 만권당에 머물면서 원의 유명한 학자들과 교유했다. 그는 세 차례나 중국의 서역과 강남을 여행하면서 세상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뒤이은 이곡(1298∼1351)과 그의 아들 이색(1328∼1396)의 시대에 이르면 고려 지식인의 역사관은 이전 시대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1333년 원의 과거에 급제한 이곡은 이듬해 원의 관리로서 금의환향했다. 그때 송경이란 원의 관리가 시 한 수를 헌정했는데 “연개소문 후에 무사(武事)가 줄어들고 책구루(溝婁) 아래에 글 읽는 소리 이어졌네”라고 하면서 고려의 문풍을 칭찬했다. 책구루는 고구려와 당(唐) 사이 놓인 성을 말한다. 이색은 이 구절을 “기자(箕子)가 끼친 풍교(風敎) 어언 2000년에 책구루 아래에 글 읽는 소리 이어졌네”로 수정해 이곡의 문집에 수록했다. 그렇게 고려는 더 이상 고구려를 계승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고려 지식인의 정신세계는 삼한일통의 무위(武威)가 아니라 기자의 풍교를 숭상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1392년 이뤄진 조선왕조의 개창은 그 이전 150년간 한반도에 가해진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의 작용을 배제하고선 설명하기 힘든 사건이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