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된 두 소녀를 구하라"… 폭력에 대항하는 용기 보여준 테세우스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16) 정의(正義)

테세우스의 好意
오이디푸스의 간절한 요청
경청하고 최선을 다해 협조
도움 청하는 자에 신뢰 지켜

인간과 도시와 正義
도시의 규율을 지켜나가며
비로소 참다운 인간으로 성장
도시를 지탱하는 것이 '정의'

함무라비 법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원칙
도시 바빌론을 지키는 '정의'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꽃피는 알몬드 나무’(유화, 73.3㎝×92㎝).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그 다른 무엇을 ‘문화(文化)’라고 부른다. 문화란 향기 나며 유유자적하는 한 그루 나무를 가꾸는 과정이다. 누군가 오래전에 토양에 맞는 품종을 골라 씨앗을 정성스럽게 심고, 김을 매고 거름을 줬다. 그리고 바람, 비, 안개, 공기와 같은 자연의 섭리를 간구하고 자연의 혜택을 입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가지를 치고 병충해에 시달리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기다린다. 그러면 가장 적절한 순간에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래서 고귀한 꽃을 피운다.

복수동태법(復讐同態法)인간은 이런 문화를 위해 도시라는 인위적인 공간을 창조했다. 달리 제한된 공간을 구획하고 그 안에서 살면서 다른 인간들과 관계를 맺어 상부상조하는 것이 문화를 구축하는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조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 즉 ‘도시라는 공간에서 사는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도시의 규율을 준수하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그 인간은 여전히 동물이지만, 자신의 직계 가족과 친족뿐만 아니라 자신과 상관없는 다른 가문, 이방인, 외국인들과 공존하려는 수고를 통해 인간이 된다. 가족과 친족이라는, 자신에게 익숙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관습과 습관이 삶의 유일한 잣대로 여기는 인간들은,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사실 동물이나 다름없다. 그들에겐 문화가 없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한 이방인은 그것을 ‘정의’라고 선포했다. 그의 이름은 ‘함무라비’다. 함무라비는 바빌로니아 본토 사람이 아니라 오늘날 시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 북부 지역에서 기원전 20세기부터 떠돌아다니던 아모리족이다. ‘아모리’는 ‘서쪽에서 침입한 자’라는 의미다. 유일신 종교의 창시자 아브라함도 아모리족이다. 함무라비는 바빌론 도시 한복판에 가로 225㎝, 세로 55㎝의 현무암에 서문과 282개 조항, 결문으로 구성된 ‘함무라비 법전’을 새겼다. 언어는 쐐기문자 아카드어다. 오늘날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이 법전은 인류에게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도시가 필수적이며, 도시를 지탱하는 문법은 ‘정의’라고 말한다.

함무라비가 상상한 ‘정의’는 196, 197조항에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표현됐다. “만일 자유인이 다른 자유인의 눈을 다치게 했다면, 그의 눈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치게 될 것이다. 만일 자유인이 다른 자유인의 뼈를 부러뜨렸다면, 그의 뼈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부러뜨려질 것이다.” 이것이 후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알려진 복수동태법(復讐同態法)의 전형이다. 이 조항들을 해석하는 열쇠는 ‘자유인’이라는 용어의 이해에 달려 있다. 자유인에 해당하는 아카드어는 ‘아윌룸(awlum)’이다. 아윌룸은 바빌론 사회에서 10% 이하의 왕족과 귀족을 의미한다. 바빌론에는 귀족들의 땅을 빌려 노동하고 세금을 내는 소작농(무쉬케눔·mushknum)이 50%였고, 전쟁포로나 외국인 노동자들, 그리고 세금을 지불하지 못해 노예(와르둠·wardum)로 전락한 하층민들이 40%를 구성했다. 198, 199조항을 보면 함무라비가 생각하는 정의의 한계가 드러난다. “만일 자유인이 소작농의 눈이나 뼈를 다치게 한다면, 자유인은 은 한 냥(570g)을 지불하면 된다. 만일 자유인이 다른 사람 노예의 눈이나 뼈를 다치게 한다면 은 반 냥(375g)을 지불하면 된다.” 함무라비 법전은 기원전 18세기 바빌론이라는 도시에 인간다운 삶을 위한 ‘정의’를 제정해 새겨 놨지만, 그것은 왕족과 귀족만을 위한 노리개였다. 바빌론의 소작농, 외국인,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노예들의 삶에 함무라비 법전은 정의의 상징이 아니라 불의와 착취의 수단이었다.
< 함무라비 법전 석비 > 기원전 1750년께 제작된 ‘함무라비 법전 석비’(현무암, 225㎝×79㎝×47㎝).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
호의(好意)테베 왕 크레온은 오이디푸스를 자신의 도시로 데려가서 그 외곽에 감금하고 죽게 할 작정이다. 오이디푸스를 위한 일이 아니다. 오이디푸스의 시신이 자신의 왕권과 테베의 안녕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델피의 신탁 때문이다. 크레온은 먼저 오이디푸스의 두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납치해 테베로 이송하는 중이었다. 콜로노스의 시민들과 오이디푸스는 폭력을 행사하는 크레온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때 무대 위로 아테네 왕 테세우스가 자신의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등장한다. 오이디푸스는 테세우스에게 하소연한다. “그대가 보고 있는 크레온이, 내 두 딸을 내게서 빼앗아 갔소이다.”

이 상황은 테세우스에게 딜레마다. 테베 왕인 크레온이 자신이 왕으로 있는 아테네의 입구, 콜로노스에서 장님의 두 딸을 납치한 사건이다. 사실 오이디푸스와 그의 두 딸은 테베 시민이기 때문에 납치라기보다는 ‘본국 송환’ 사건이다.

테세우스는 장님이자 외국인인 오이디푸스의 말을 듣자마자 지체 없이 부하들에게 명령한다. “너희들 가운데 한 명은 되도록 빨리 저기 제단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백성들에게 제물 바치는 일을 중단하고, 더러는 걸어서, 더러는 말을 타고 두 길이 만나는 곳으로 속력을 다 내어 달려가도록 재촉하라.”(898~901행) 테세우스는 콜로노스에서 아테네를 위한 국가 의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그는 그 중대한 의례를 중단하고, 외국인 납치사건을 먼저 해결하라고 명령했다.왜 테세우스에게 외국인 납치사건이 국가의례를 중단할 만큼 중요한가. 테세우스는 말한다. “소녀들이 가버려서 내가 폭력에 졌다고, 여기 이 나그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라.”(902~903행) 아테네 왕 테세우스에게 정의는 자신의 눈앞에서 폭력으로 불의한 일을 당한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행위다. 그가 자국민이 아니라 적대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혹은 반인륜적인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상관없다. 테세우스에게 정의는 자신의 눈앞에서 도움을 청하는 자에게, 심지어 그가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호의(好意)를 베푸는 용기다.

아레오파고스

크레온은 새로운 정의인 ‘호의’에 대해 반박하며 테세우스에게 주장한다. “나는 그대들(테세우스와 아테네 시민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거하는 가장 부정(不淨)한 결혼을 한 것으로 드러난 불경한 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나는 또한 그대들의 나라에는 지혜로운 아레오파고스(Areopagos)가 있어 이런 부랑자들이 시내에서 함께 사는 것을 허용치 않을 줄 알았습니다.” 아레오파고스는 ‘분노의 여신들의 바위’라는 뜻으로 살인, 성물파괴, 방화와 같은 중죄를 다루는 법정이다. 아레오파고스는 아테네 귀족 원로들의 모임으로 도시의 중요한 사항을 결정하는 곳이었지만, 기원전 594년 솔론의 개혁을 통해 후에 등장하는 민주법정의 근간이 됐다. 크레온은 아레오파고스를 들먹이며 함무라비 법전에 등장하는 복수동태법에 의거해 외국인 부랑자 오이디푸스를 양도할 것을 요구한다.크레온과 오이디푸스는 테세우스 앞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주장한다. 이 장면은 아테네가 추구하는 새로운 아레오파고스의 법정이다. 이번엔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변론한다. “자,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불행하도록 태어나, 누구에게 무엇을 행하는지 영문도 모르고 내 아버지와 치고받다가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이 의도되지 않은 행위를 자네(크레온)가 나무란다면, 어떻게 정당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974~977행) 이어 자신의 불행한 결혼에 관해 덤덤하게 말한다. “어머니와의 결혼에 관해 말하겠습니다. 자네(크레온)의 누이였던 그분과의 결혼에 관해 말하도록 나를 강요하다니 자네는 부끄럽지 않은가!(…) 그분은 나의 어머니였어. 그래 내 어머니였지. 이 무슨 불행이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몰랐고 그분도 모르셨어. 그리고 그분은 자신에게 치욕이 되도록 자신이 낳은 아들인 내게 자식들을 낳아주셨어.”(978~985행)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불의가 아니라 운명의 소용돌이에서 만신창이가 된 한 불쌍한 영혼의 몸부림이다. 오이디푸스의 말을 들은 원형극장의 관객과 콜로노스 주민으로 구성된 합창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어떻게 신은 오이디푸스라는 인간을 이토록 처참하게 만드셨는가! 합창대 리더가 테세우스 왕에게 외친다. “왕이시여! 이 나그네는 착한 사람입니다. 운명은 기구하지만 그는 우리가 구해 줄 만한 사람입니다.”(1014~1015행) 테세우스는 한 인간의 진실한 말이, 아테네를 지탱해 온 아레오파고스 법정의 법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정의란 경청과 연민이 없다면 폭력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의로운가? 우리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인가? 정의는 오랜 시간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성찰이 없다면 폭력이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착각하고 쏟아내는 말이나 글들은 악취가 나는 잡담이자 편견일 뿐이다. 나에게는 문화가 있는가? 오랜 시간을 기다린 향기가 나는 ‘정의’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씨를 뿌린 적이 있는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