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마시며 그림 그리고 맛집 요리비법 전수 받고 문화센터서 '저녁 있는 삶' 즐긴다

취미생활에 재미 붙인 2030 직장인

주 52시간 시행 2개월…
백화점 문화센터 '가심비' 충족
칼퇴근 후 여가 즐기는 직장인 몰려
꽃꽂이·필라테스 등 조기 마감

피규어 조립·아르헨티나 탱고 배우기 등
취향저격한 이색 강좌도 속속 등장

같은 취미 배우며 친목 다져
'회사 밖 인맥' 넓히기도
현대백화점 필라테스 수업
“반시계 방향으로 꽃을 쥐어볼까요. 천천히 하나씩, 서두르지 말고요.”

지난 22일 서울 신도림동에 있는 현대백화점 디큐브시티 문화센터. ‘수국 꽃다발 만들기’ 강좌에서 수강생들이 리시얀셔스, 샤론 등 생소한 꽃을 만지면서 이름을 익히고 있었다. 전지가위로 잔가지를 자르고 잎을 다듬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꽃잎이 다칠세라 말없이 집중하는 순간이 이어진다.수강생들의 손길은 서툴지만 눈빛만큼은 플로리스트 못지않다. 이날 수업을 한 강사 석혜선 씨(29)는 “커다란 수국 다발을 쥐고 있으면 손가락 근육이 아파올 것”이라며 “서두르지 말고 자신만의 작품 디자인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리본을 이렇게 묶는 게 맞냐”며 옆 수강생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강사가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두 손 가득한 꽃다발이 그럴싸하게 만들어졌다.

틈틈이 꽃꽂이 수업을 듣는다는 수강생 천진영 씨(33)는 “직장 또는 집에서 가까운 백화점 지점을 찾아가 문화센터 수업을 듣고 있다”며 “향기를 맡으며 꽃을 만지다 보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내 작품도 가져갈 수 있다”고 말했다. 강사 석씨는 “수업료에 비해 이론 강좌와 실습 등 구성이 알차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감)를 따지는 젊은 수강생 비율이 높다”고 설명했다.
현대백화점 꽃꽂이 수업
◆취미 찾으러 문화센터 가는 ‘2030’30~50대 주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문화센터에 ‘나만의 취미’를 찾으러 가는 20~30대 젊은 직장인이 늘고 있다. 지난 7월1일부터 주 52시간 근로제가 도입되면서 야근과 회식이 줄고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퍼지면서다.

백화점 문화센터는 특히 가심비가 좋아 인기가 높다. 개인 강습, 소규모 공방 등에 비해 가격은 훨씬 저렴하면서 짧은 시간에 수업을 압축적으로 들을 수 있어서다. 수강 인원도 보통 5~10명 안팎으로 구성해 1인당 수강료 부담을 낮추고 있다.

대표적인 수업 중 하나가 플라워 클래스다. 개인 플라워숍에서 수업을 들으면 수강료가 1회에 10만원을 훌쩍 넘는다. 문화센터에선 재료비까지 포함해 4만원이면 충분하다. 자신의 ‘작품’을 가져가 인테리어에 활용할 수 있고, 정서적 안정도 느낄 수 있어 점점 많은 수강생이 찾고 있다는 설명이다.

미술 수업도 수강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웹툰·팝아트·일러스트 등 최근 젊은 층이 좋아하는 분야의 강좌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현대백화점 판교점은 매주 토요일 웹툰작가 몽냥과 함께 ‘일상 드로잉’ 수업을 열었다.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일기처럼 가볍게 표현할 수 있어 그림 그리기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부담 없이 듣는다.

AK플라자는 분당점과 수원점에서 맥주를 마시며 그림을 그리는 ‘아셔그려 아트 클래스’를 열고 있다. 원데이 클래스인 이 강좌는 맥주값과 미술 재료값을 포함해 1회 수업료가 3만원이다. 퇴근 후 술 한 잔 마시며 취미 생활도 즐길 수 있어 수강신청이 조기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는 게 AK플라자 측 설명이다.
신세계백화점 그림 강좌
◆제주살이부터 피규어 만들기… 이색 강좌 열풍

백화점 문화센터에서만 찾을 수 있는 이색 강좌도 20~30대를 끌어들이고 있다. 최근엔 경험을 공유하는 강좌들이 주목받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이번달 서울 소공동 본점에서 ‘제주 한 달 살기’ 강좌를 열었다. 빈 공간을 민박으로 대행 운영해주는 업체인 비플의 김지윤 대표가 제주에서 한 달을 지내는 동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체험자에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을 강연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젊은 직장인 가운데 삶에서 여유를 찾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전했다. 문화센터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용에 익숙한 2030 직장인을 겨냥해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에서 유명한 사람들을 강사로 초빙하기도 한다.

현대백화점은 SNS에서 입소문을 타 유명해진 ‘맛집’ 대표들로부터 직접 요리를 배우는 강좌를 마련했다. 서울 성동구 서울숲에 있는 베트남 음식점 ‘치팅데이’, ‘마약샌드위치’로 유명한 해방촌의 ‘치코미아 마이애미’ 등의 대표들이 강의에 나섰다.

그동안 문화센터에선 별로 인기가 없었던 강좌도 요즘엔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특정 취미에 빠진 사람을 일컫는 일본어 오타쿠를 의미하는 인터넷 용어인 ‘덕후’가 늘어나면서 나타난 변화다. AK플라자 구로본점은 ‘키

트(어린이처럼 장난감을 좋아하는 어른들)’를 겨냥해 직접 피규어를 만들어보는 강의를 개설했는데 10명 정원인 이 강좌도 조기에 마감됐다. 수강생들은 일본의 로봇 캐릭터인 건담을 색칠하고, 전차와 비행기 무늬를 그리고 꾸미는 등 취향대로 디자인하기도 한다.
맥주 제조
◆사교 생활도 문화센터에서

자신만의 취미를 찾아 즐기면서 ‘회사 밖 친구’를 사귀기 위해 백화점 문화센터를 찾는 20~30대도 늘고 있다.

춤을 배울 수 있는 강좌가 대표적이다. 현대백화점이 직장인을 위해 퇴근 시간대에 개설한 댄스 스포츠가 인기다. AK플라자 구로본점은 아르헨티나 탱고 수업도 한다. 가장 기본 단계인 스텝 밟기부터 파티에서 춤추기 등을 가르쳐준다. 10회 강의의 수업료는 15만원. “술자리 한 번 덜 갖는 비용으로 고혹적인 취미를 얻게 됐다”는 수강생이 적지 않다.

20~30대가 문화센터를 찾는 비중이 늘면서 최신 가요의 안무를 배우는 강좌도 등장했다. 좋아하는 가수들의 안무를 배우면서 다이어트도 할 수 있어 수강생이 몰린다. 신세계백화점은 트와이스, 아이콘 등 아이돌 그룹 노래에 맞춰 최신 안무를 배우는 ‘방송댄스반’을 다수 개설했다.

한 달 전부터 강좌에 참여한 대학원생 김성연 씨(27)는 “유행하는 춤을 배우고 운동도 할 수 있어 선택했다”며 “안무를 익혀갈 때마다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미니 드론 조립
■"취미생활 어떤 것까지 해봤니"… 취미용품 정기배송 서비스도 뜬다

주 52시간 근로제가 시행된 지 2개월이 지났다. 달라진 근무 환경 속에서 ‘방황하는’ 20~30대 직장인이 적지 않다. ‘칼퇴근’ 후 여가 시간이 늘어나는 추세에 이를 이용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나에게 맞는 취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다.

지난해 잡코리아가 직장인 1150여 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2.2%가 ‘취미가 없다’고 대답했다. 일하는 사람의 절반 가까이는 여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내지 못하고 있다는 슬픈 현실이다.

압화 드로잉
워라밸 실천을 위해 취미 발굴도 중요한 과제로 등장했다. 취미 큐레이션업체 하비박스는 “취미·특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흔한 대답인 ‘독서’ ‘운동’ 말고는 할 말이 없는 이들을 위해 취미를 개발해주고 ‘배달’까지 해주는 독특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 달에 한 번씩 새로운 취미를 골라주고 기획해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는 키트(kit)를 집으로 보내주는 방식이다.

키트 안에는 건담 조립 세트와 손바닥만 한 미니 드론 만들기부터 레고 맞추기 세트 등이 매회 다르게 들어간다. 취향대로 세상에서 하나뿐인 향수를 제조할 수 있는 키트도 있다. 에그타르트 만들기와 수제맥주 주조에 도전할 수 있도록 재료를 배송하는 서비스도 갖췄다. 키트 상품은 ‘하비 큐레이터’로 불리는 각 취미 분야의 전문가들이 기획해 구성한다.잘 맞는 취미를 찾기 위해 본인의 성향 파악은 필수다.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활동에서 활력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본 뒤 그에 맞는 취미 생활을 추천해준다. 즐거웠던 취미 경험, 시도해보고 싶은 일, 누구와 얼마나 활동적인 여가를 보내고 싶은지 등을 파악해 창작형·제작형·감상형·오락형 등으로 성격을 분석하는 방식이다. 3분 정도 걸리는 이 테스트는 하비박스의 온라인 사이트에서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안효주 기자 j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