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축구'로 더 가까워진 한국·베트남… 현지 진출한 국내 기업들도 신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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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 포커스지난 1일 인도네시아 자와바랏주 보고르의 파칸사리 스타디움.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축구 동메달 결정전을 마친 박항서 베트남 대표팀 감독이 무거운 얼굴로 기자회견장에 들어섰다. 승부차기 접전 끝에 아쉽게 4위를 기록한 박 감독은 “매 경기 최선을 다해준 우리 선수들에게 감독으로서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는 소감을 남겼다. 소회를 밝힌 그는 잠시 안경을 벗고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 베트남에서 박 감독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한류 드라마와 K팝 열풍에 이어 박항서라는 인물이 새로운 베트남의 히트 상품으로 떠올랐다. 국내 경제계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양국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가 교역 증진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베트남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박항서박 감독은 현역 시절보다 지도자로서 축구팬들에게 익숙하다. 1991년 안양 LG 코치로 부임한 박 감독은 수원 삼성 등을 거쳐 2002년 한·일 월드컵 수석코치로 활동했다. 이때 거스 히딩크 한국 대표팀 감독을 보좌하며 한국의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냈다. 이후 23세 이하 국가대표팀, 전남 드래곤즈, 상주 상무, 창원시청 감독을 역임했다.
박 감독이 베트남 대표팀을 이끌기 전까지 베트남은 동남아시아 축구계에서도 ‘동네북’ 취급을 받고 있었다. 지역 라이벌인 태국에 번번이 패하는 등 국민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베트남 축구협회가 새 인물을 찾기 시작한 배경이다. 박 감독은 지난해 9월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성인 및 23세 이하 감독으로 선임돼 10월 취임했다. 취임 초기 팬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유럽의 프로팀 출신도 아니고 한국 실업팀 감독을 맡던 사람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영입했다는 이유에서다.
박 감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철학으로 대표팀을 바꾸는 일에 착수했다. 베트남에선 ‘우리 선수들은 체격이 작고 체력이 약해 축구를 잘하기 어렵다’는 비관주의가 팽배하던 때였다. 박 감독은 선수별 체력 데이터를 직접 만들었다. 베트남 선수들의 체력은 생각보다 약하지 않았다. 고정관념이 스스로를 약하게 만든 것인지 몰랐다. 박 감독은 체력 훈련 대신 스피드와 조직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전술을 짰다.
처음엔 선수들과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박 감독은 선수들의 발을 직접 마사지하는 등 몸으로 부딪치며 소통했다. 아침 식사로 쌀국수를 먹는 모습을 보고는 고기, 우유, 두부 등 단백질 식단으로 바꿨다. 선수들의 체력 보강을 위해서다.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도록 근력 운동도 빼놓지 않았다. 무엇보다 선수들에게 “누구에게도 질 이유가 없다”며 패배의식을 떨치도록 강조했다. 지난 1월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박 감독과 베트남 대표팀은 결승까지 오르며 파란을 일으켰다. 베트남 정부는 대표팀의 성적을 치하하는 의미로 선수단 전원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한·베트남 경제 교류에도 청신호국제대회에서 잇따라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박 감독은 베트남의 국민 영웅이 됐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우호 관계도 증진되면서 베트남에 진출한 국내 기업도 덩달아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오래전부터 베트남에 투자해온 삼성전자는 ‘박항서 마케팅’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삼성전자는 박 감독을 베트남 법인의 브랜드 홍보대사와 광고모델로 선정해 텔레비전 광고를 하고 있다. SK그룹, 포스코, 효성 등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다른 대기업도 ‘한국 사랑’ 분위기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일단 한국 기업이라고 하면 축구 얘기를 시작으로 긍정적인 대화가 이뤄진다는 게 기업들의 설명이다. 현대자동차도 올 상반기 2만7429대를 판매하는 등 베트남에서 좋은 실적을 내고 있다.
편의점 사업을 하는 GS리테일의 주류 매출은 아시안게임 한국 대 베트남전 당일 20% 이상 늘었다. 전 주 같은 요일에 비해서다. 베트남에 있는 GS25 편의점에서도 즉석식품과 음료 매출이 증가했다. 박 감독을 광고모델로 기용한 신한베트남 은행 역시 5개월 사이에 고객 13만 명이 증가했다.
양국 정부 간 교역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양국 교역액은 1992년 수교 당시 5억달러였는데, 지난해 640억달러까지 늘었다. 양국은 2020년까지 교역액 1000억달러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가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공략을 본격화하면서 세운 목표가 2000억달러인데, 베트남이 절반을 차지할 것이란 전망이다. 한국무역협회 관계자는 “한국의 베트남 투자가 점차 고부가가치 산업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며 “베트남의 시장 개방폭이 넓어지는 만큼 양국 교역액이 빠르게 늘어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상익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