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운명에 매인 삶… 품위있게 '종착점'을 준비하는 오이디푸스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18) 품격(品格)

두 종류의 '아담'
남들에게 보여지는 성공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리는 세속적 인간

평정심을 유지하며 침묵하지만
옳고 그름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운명에 대한 사랑
예측 불가능한 인생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 지혜

오이디푸스의 선택
나이 들어 죽거나 병이 들어
죽음의 먹이가 되기를 거부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장악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7, 유화, 98×72㎝). 독일 함부르크 미술관 소장. 한 사람이 산 정상에 올라 산마루들을 덮은 안개를 내려다보고 있다. 운명과 같은 미지의 세계를 자신의 의지와 품격으로 극복하려는 결기를 그렸다.
나다운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보다 더욱 당혹스럽고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나는 훌륭한 죽음을 위해 오늘이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미국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2015년 펴낸 《인간의 품격(원제:The Road to Character)》에서 개인이 지닌 두 가지 단면을 소개한다. 한 단면은 우리 대부분이 목매는 소위 ‘이력서에 나열하는 내용들’이다. 그 사람이 세상에서 성취한 소위 성공이라고 여겨지는 항목들의 나열이다. 이것과는 다른 단면이 있다. 그 사람의 장례식에서 다른 사람들이 죽은 그를 위해 말하는 내용들이다. 내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내 주위 사람들이 나를 두고 하는 말들이다.

두 종류의 인간브룩스는 한 랍비의 혜안을 빌려온다. 유대경전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은유를 사용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상엔 두 종류의 ‘아담’이 있다. ‘제1 아담’은 남들이 만들어 놓은 성공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세속적인 인간이다. 이 아담은 항상 남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우위를 차지하는 데 혈안이 된 짐승이다. ‘제2 아담’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그는 침묵하지만 자신의 기준에서 옳고 그름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는 남들에게 선행을 베풀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최선을 다한다. 남에게는 정직하고, 자신에게는 자랑스러운 사람이다. 브룩스는 우리에게 제 1아담과 제2 아담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라고 충고한다.

품격(品格)이란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기품이나 위엄이다. 그런 품격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대 로마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자신에게 일어날 최악의 상황들을 항상 상상하고 그것을 미리 준비하는 마음에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마음가짐을 라틴어로 ‘프레메디타치오 말로룸(premeditatio malorum)’이라고 말했다. 이 문구를 직역하면 ‘최악의 일들에 대한 예견(豫見)’이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나 혹은 만날 사람들에게 일어날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미리 계획을 세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항해를 한다면 폭풍을 대비한다. 혹은 선장이 병에 걸려 쓰러질 수도 있기 때문에 선장 못지않은 능력을 갖춘 항해사를 승선시킨다. 해적의 습격을 받거나 암초를 만나 배가 파선되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대책도 미리 세운다. 세네카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떤 일도 지혜로운 사람의 기대 이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모르 파티니체는 세네카의 ‘프레메디타치오 말로룸’을 잘 알려진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문구로 설명한다. 아모르 파티를 직역하면 ‘(죽음과 같은)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이는 자신에게 할당된 운명을 있는 그대로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 그것이 슬픔이든지 기쁨이든지, 그것이 선하든지 악하든지 인생에서 예측 불가능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것을 관조해 항상 미래의 자신을 위한 최고의 발판이나 지렛대로 만드는 지혜가 아모르 파티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만물 가운데 필요한 것들을 점점 더 아름다운 것들로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나는 이런 것들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이들 중 한 사람이 될 것이다. 아모르 파티. 이 문구가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길 원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를 탓하길 원하지 않는다. 나는 심지어 나를 고소하는 사람들을 고소하길 원하지 않는다.” 니체는 아모르 파티를 “인간이 추구해야 할 위대함”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자신에게 우연히 다가온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운명조차 그의 긍정적인 마음가짐인 아모르 파티의 정신을 말살할 수는 없다고 했다. 오히려 그런 고통은 이 정신을 소유한 사람을 한 단계 높은 단계의 인간으로 승화하게 하는 기반이 된다.

오이디푸스는 세네카가 말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최악’을 경험했으며, 니체가 말한 ‘운명’의 종착점인 죽음과 씨름하는 인간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그런 인간인 오이디푸스가 고통과 죽음을 어떻게 맞이했는지를 마치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처럼 덤덤하게 노래한다.폴로네이케스의 명분

폴로네이케스는 자신이 테베에서 추방한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찾아왔다. 자신이 테베의 왕이 되는 데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는 게 유리할 것이란 신탁을 받아서다. 그는 이제 동생 에테오클레스와 테베의 왕권을 놓고 전투를 할 참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추방당한 동생 안티고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티고네야! 내가 추방을 당한다는 것은 치욕이야. 장남인 내가 아우에게 이렇게 조롱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1422~1424행) 그는 자신이 장남이기 때문에 당연히 테베의 왕으로 군림했어야 하는데, 동생에게 쫓겨난 것을 치욕으로 생각한다. 아버지를 추방시킨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신이 추방당한 사실에 창피함을 느낀다.

명분(名分)은 자신이 하는 일을 보람되게 지탱해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폴로네이케스는 자신이 왕권을 다시 찾아야 하는 명분이 없는 어리석은 자다. 그는 단지 장남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제1 아담’, 즉 남에게 전시할 자신의 모습에 상처를 받아 괴로워하는 미성숙한 인간이다. 명분은 자신의 명분을 소홀히 여기거나 알지 못하는 사람을 버린다. 폴로네이케스와는 달리 외관상으로, 육체적으로 고향에서 추방당한 그의 아버지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 그리고 죽어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깨달은 자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부친 살해자와 근친상간자로 손가락질받지만, 오이디푸스는 남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에 집중한다. 그는 자신의 운명적인 삶의 명분을 찾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 죽어가거나 병이 들어 죽음의 먹이가 되기를 거절한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장악할 것이다.시간

콜로노스의 주민들로 구성된 합창대는 우주의 유일한 주인인 ‘시간’의 등장을 노래한다. 시간은 만물을 공평하고 정의롭게 심판하는 종결자다. 그들은 노래한다. “보라, 새로운 재앙들이, 운명으로 무거워진 재앙들이 새로이 덮치고 있다. 눈먼 나그네(오이디푸스)로부터, 아니면 혹시 운명이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것인가? 신들의 포고들을 공허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시간은 언제나 그 포고들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다네. 어떤 것들을 넘어뜨렸다가, 그 다음날 도로 높이 일으켜 세운다네.”(1448~1455행) 시간은 만물을 적절한 시간에 생성시키고 소멸시킨다. 시간은 신들을 시켜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을 심판한다.

오이디푸스는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눈이 아니라 귀로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하늘의 천둥소리와 우박은 분명 제우스신이 보낸 징후다. 오이디푸스는 인생의 마지막 관문인 죽음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자연의 소리를 통해 직감할 정도로 성숙하다. “얘들아, 여기 있는 나에게 신께서 예언하는 인생의 종말이 다가왔다.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다.”(1472~1473행) 그러자 안티고네는 아버지의 그런 혜안의 출처를 궁금해 하며 묻는다.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아세요? 뭘 보고 그렇게 판단하세요?” 오이디푸스는 딸의 얼굴을 보면서 신비스러운 말을 건넨다. “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단다.”(1475행) 이 문구는 그리스어 원문에는 ‘칼로스 카토이다(kals katoid(a))’다. ‘카토이다’는 ‘잘 안다’라는 의미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인생 역경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인생을 마쳐야 할지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칼로스’라는 부사를 통해 전달한다. 칼로스는 ‘아름답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나, 더 근본적인 의미는 ‘적절하다, 조화롭다’이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의 역경을 딛고 일어나 남들이 보기에는 흉측한 자신의 삶을 모든 사람이 흠모할 만한 위대한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제 인생이란 작품에 화룡점정을 찍을 참이다. 인생을 잘살기 위해 일정 기간의 배움이 필요하지만, 잘 죽기 위해서는 인생 전체의 배움이 필요하다. 오이디푸스는 이제 품위 있게 자신의 죽음을 위한 장례를 준비할 것이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