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끝에서 살아난 수묵화의 정제된 숨결… 송수남의 梅·蘭·菊·竹

한경갤러리, 추석 맞아 남천 송수남 초대전
18일 서울 중림동 한경갤러리를 찾은 관람객이 남천 송수남의 수묵화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조선시대 유학자 퇴계 이황은 눈 속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워내는 매화의 강건한 기상을 무척 좋아했다. 임종 직전 자신도 모르게 설사를 했던 그는 제자에게 ‘갓 피어나기 시작한 매형(梅兄·매화) 보기 송구스럽다’며 농담을 날렸다. 중국 전한(前漢)의 유향이 기록한 열선전(列仙傳)에는 국화로 가득한 연못가에 살며 매일 새벽 꽃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받아 마신 까닭에 1700세까지 살았다는 ‘팽조(彭祖)의 전설’이 기록돼 있다.

매화와 국화를 포함해 대나무, 난까지 사군자(四君子)는 옛 선비들에게 삶의 정체성과 시대정신을 표현했던 그림 소재였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사군자 그림은 ‘선비 자격증’으로 불렸다.2013년 6월 작고한 ‘현대 수묵화의 거장’ 남천 송수남 화백의 사군자 그림을 모은 ‘매(梅)·난(蘭)·국(菊)·죽(竹)’전이 지난 17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개막해 다음달 5일까지 이어진다. 추석 명절을 맞아 마련된 이번 전시에는 단아하고 향기로운 난초, 선비의 기상을 닮은 대나무, 절개의 국화, 눈 속에서도 청향을 뽐내는 매화 등 사군자를 그대로 옮겨 놓은 수묵화 40여 점이 걸렸다. 출품작들은 송 화백이 말년에 잠시 외도한 다채롭고 생기발랄한 꽃 그림에서 벗어나 고요한 수묵이나 담채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한국화의 맛을 보여준다.

전주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가 4학년 때 동양화과로 옮긴 송 화백은 전통 수묵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토대로 평생 현대적 조형성을 추구하며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1960년대 수묵의 번짐과 얼룩을 이용한 추상 작업을 시작한 그는 한국적인 이미지의 모티브로 화면을 채우는 ‘한국 풍경’을 비롯해 우리의 야산을 수평 구도로 작업한 산수화 작업, 화려한 꽃 그림을 거치며 독자적인 화풍을 정립했다. 끊임없는 실험 정신으로 전통 수묵화를 현대적으로 변용, 한국 미술에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했다.

송 화백은 또 지나친 상업주의, 복고주의와 권위주의로 한국화의 위기를 맞은 1970년대 말 ‘새로운 한국화의 정립’을 기치로 일어난 ‘현대 수묵화 운동’을 주도했다. 그동안 시와 그림을 함께 엮은 《세월의 강 수묵의 뜨락에서》 등 저서 10여 권을 펴내며 수묵화의 중요성을 설파했다.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은 글씨와 어우러지며 우리 역사와 정신을 되비춘다. 꼿꼿한 대와 칼날 같은 댓잎에는 선비의 기상이 서려 있고, 난초의 우아한 자태에선 또 다른 미감이 풍긴다. 더구나 난 그림은 그의 완숙미가 흠뻑 묻어나는 작품이다. 국화 그림 역시 서리 속에서 꼿꼿이 사는 현대인의 덕을 응축해냈다. 먹선 하나에서도 사람과 자연, 우주를 볼 수 있고 작은 붓질 하나로 현대인의 고단한 역정까지 품어낸 듯하다.

인재희 한경갤러리 큐레이터는 “사군자 그림은 단순한 구성과 서예 기법을 활용한 문인 취향의 특성으로 인해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며 “한국화의 명맥과 가치를 드높인 송 화백의 작품을 통해 수묵화의 양식과 그 속에 담긴 현대인의 시대정신을 살펴보기 위한 자리”라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