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이 쌓아올린 노예탑… 잉헤니오스 계곡에서 자유를 외치다

여행의 향기

낭만이 넘치는 쿠바여행 (7) - 트리니다드 ②
농장주가 노예를 감시하기 위해 만든 이즈나가의 노예탑
우리가 여행하는 이유는 사람다운 삶이 어떤 것일까 비교해 보는 게 아닐까? ‘인간다운 삶을 찾아서 세상을 두리번거리는 행위’로 은유할 수 있다. 트리니다드의 볼거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트리니다드 시내, 양콘 해변, 그리고 잉헤니오스 계곡(Valle de los Ingenios)이다. 로스 잉헤니오스 계곡은 ‘설탕 제분소 계곡’이라는 뜻이다. 쿠바 설탕산업 전성기에는 설탕 제분소가 50개 이상 있었으며,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3만 명을 넘었다. 주변에는 사탕수수 밭이 있었다. 이곳은 기후와 토양이 사탕수수 경작에 적절했으며 항구, 철도, 도로를 갖춰 설탕 수송과 수출에 편리했다. 설탕산업으로 이 지역 경제가 한때 번성했다. 인간의 삶에 대해 자문자답하기 좋은 곳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잉헤니오스 계곡
잉헤니오스 계곡은 트리니다드 시내와 함께 1988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사탕수수 밭과 관련한 유적이 박물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스나가 지역은 트리니다드에서 북쪽으로 16㎞ 떨어진 곳으로 1750년 역사에 등장한다. 1795년 페드로 이스나가(Pedro Iznaga)라는 악명 높은 노예상인이자 사탕수수 농장 경영자가 매입한다. 이곳에는 그의 저택과 설탕 계곡의 랜드마크인 노예탑으로 불리는 이스나가 탑이 남아 있다. 농장주의 지시로 노예가 스스로를 감시하는 탑을 만든 아이러니가 서려 있다. 노예란 주인의 소유물이 돼 부림을 당하며 권리와 생산 수단도 없이 물건처럼 매매되는 피지배인이다. 저택 뒤편에는 사탕수수를 압착해서 액체로 만드는 초가 방앗간이 있다. 사탕수수를 끼우지 않을 때는 쉽게 돌아가는 거대한 맷돌 압착기도 사탕수수 하나 넣고 돌려 보니 많은 힘이 들었다. 인력으로 압착기를 돌리며 노동에 시달렸을 노예들의 고달픔을 간접 경험할 수 있다. 짜낸 사탕수수 액체를 마셔 볼 수도 있다.

잉헤니오스 계곡을 철도를 이용해 가는 방법이 있다. 겉모습으로 봐서는 움직일 것 같지 않은 비현실적인 기차가 다닌다. 레일 사이 무성한 잡초가 흥망성쇠의 역사를 상징하고 있다. 설탕 제분소의 전성기에 들어선 쿠바 철도의 역사는 유서가 깊다. 과거 증기기관차가 석탄을 연료로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이 계곡을 달렸을 생각을 하면 그리 멀지 않은 시절 산업의 구조가 지금과 달랐고 인간의 욕망이 설탕에 머물던 때의 향수가 밀려온다. 철도 여행은 저절로 낭만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차창은 그야말로 움직이는 스크린이다. 계절 따라 대표적인 컬러들이 차창을 스친다. 목적지를 향해가는 여행의 설렘 그리고 차안에 펼쳐지는 인정이 넘치는 풍경은 절로 이야기가 튀어 나올 분위기다.
노예탑에서 내려다본 풍경
그러나 철도는 경제적 목적으로 보았을 때는 전쟁과 수탈의 역사를 벗어날 수 없다. 철도 건설의 기본 동기는 언제나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본국인 스페인보다 먼저 쿠바에 철도가 놓인 시기가 1837년이다. 영국에서 1825년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실용화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 철도가 설치됐다. 쿠바의 철도는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최초로 건설한 것이다. 스페인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늦은 1848년에 비로소 철도를 개통했다. 증기기관차로 대변되는 산업혁명 시절에 쿠바에 이렇게 일찍 철도가 놓이고 운행했다는 것을 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경제적 동기가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철도의 역사만 보면 쿠바는 선진 문명국이지만 초라한 철로의 흔적들을 보면 경제적 동기로 이뤄진 것들은 쉽게 쇠퇴하기 마련이라는 교훈을 얻는다.

노예감시탑 아래 펼쳐진 장쾌한 풍광

노예탑 꼭대기서 만난 프랑스 여인
바람의 평원인지 감시탑 주위에 강한 바람이 불어댄다. 노예감시탑 아래 넓은 평지에 수예품인 하얀 천을 말리는 풍경이 펼쳐진다. 노예의 검은 역사에 순백의 옷감이 바람에 휘날리는 풍광이 장쾌하다. 45m 높이, 7층으로 이뤄진 감시탑을 나무 계단을 밟으며 위태롭게 오르자면 고소공포증이라도 있는 여행자는 중도에 포기하고 내려온다. 그래도 용감하게 올라 정상에서 일망무제의 노예 도주를 감시하는 권력적인 전망을 누리는 호사를 맛볼 수 있다. 꼭대기에서 홀로 여행하는 프랑스 여성 여행자를 만났다. 은발을 휘날리는 그와 말은 잘 안 통했지만 인사를 나눴다. 혼자 여행하는 그는 노예들이 노동에 시달렸을 넓은 평원을 한참 바라보며 바람을 맞았다. 노예들은 감시인의 감시를 피해 도망치다 잡혔겠지만 이 여인은 남의 시선은 전혀 개의치 않는지 터무니없이 용감하게도 원피스를 입고 그 많은 계단을 남성들의 시선을 유인하면서 올라왔다.

세상이 바뀌어도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상황의 근본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집단 간 전쟁이 벌어져 승패가 갈리면 패자는 죽음에 처해지거나 노예가 된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대서양 노예무역이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노예제가 흔했다. 포르투갈의 항구 도시 라구스에는 포르투갈에서 처음으로 1444년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해 매매하는 노예시장(Mercado de Escravos)이 생겼다. 1441년에 모리타니 북부에서 포르투갈로 첫 노예가 들어왔다. 1552년 당시 리스본 인구 중 10%는 아프리카 흑인이었다. 16세기 후반, 왕실은 노예 독점 무역을 포기했다. 아프리카 노예를 유럽에서 거래하는 대신 노예를 아메리카 열대 식민지에 직접 운송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바꿨다. 포르투갈은 자국 식민지인 브라질에 노예를 보냈다. 15세기 노예의 3할은 아프리카 시장에서 금과 교환된다. 노예무역과 서인도 농장의 이익은 산업혁명 당시 영국 경제의 5%를 차지했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아메리카로 실려 간 아프리카인은 1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 가운데 64만5000명은 오늘날의 미국 땅으로 끌려갔다.

자유와 역사의 진보가 상기되는 이스나가탑라틴아메리카에서 스페인은 포르투갈이 겪은 문명보다 수준 높고 세련된 세략과 싸웠다.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은 천연두와 같은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약해 악성 전염병 확산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반대로 매독은 원주민에서 식민 지배자에게 옮겨가기도 했다. 원주민은 강제 노동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질병으로 허약한 원주민이 쓰러지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스페인 지배자는 대서양 노예무역에 눈을 돌렸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아프리카 노예를 부린 사람은 쿠바나 히스파니올라 같은 섬에서 일하는 스페인인이었다. 이 섬에서는 원주민 인구가 크게 줄어 최초로 원주민을 보호하는 법(부르고스 법, 1512~1513)이 생길 정도였다. 처음으로 아프리카 노예들이 히스파니올라에 도착한 때는 1501년이었다. 영국은 대서양 노예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삼각무역’은 유명한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 일당이 개척했다. 1750년에 등장한 노예제로 13개 아메리카 식민지 전체에서 합법적인 원주민이 사라지고 수입된 이전의 노예가 이 땅의 주인이 돼가고 있다. 과연 역사는 발전할까 반복할까?

쿠바 여행에서 인간의 자유와 역사의 진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인상적인 장소가 바로 이스나가탑이다. 강자는 언제나 약자를 지배한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하얀 천이 바람에 흔들리듯 우리는 흔들린다. 그리고 자유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또한 깨달으리라. 노예들의 삶을 구속하던 초원 위의 높은 탑에 올라 인간다운 삶의 하나인 여행의 자유를 만끽하며 눈부신 초록과 시원한 바람을 누려보라. 역사를 제거하면 여기가 천국이다.

트리니다드=글 최치현 여행작가 maodeng@naver.com

사진 정윤주 여행작가 traveler_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