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뒤 35조 메가시티로 우뚝…창원의 다음 과제는 '특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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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도시 이야기경상남도 창원(昌原)은 ‘편입과 통합’ 등 행정구역 개편이 가져온 도시의 흥망성쇠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2010년 7월1일 경남의 이웃 중소도시였던 마산시와 창원시, 진해시가 대한민국 자율통합 1호라는 기록을 남기며 ‘통합창원시’로 출범했다. 600년 창원의 역사는 통합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개 시 통합으로 창원시는 인구 약 110만 명, 면적 747㎢, 예산규모 2조3000억원, 지역내총생산(GRDP) 33조원이라는 메가시티로 올라서며 광역시 못지않은 도시 규모를 자랑하게 됐다.
'첫 자율 통합시' 경남 창원시
기계산업의 메카
1970년대 국가주도로 도시 개발
창원産團 조성되며 고속 성장
지역 경제활성화 주력
조선업 불황에 주력산업 위축
특례시 법제화로 돌파구 마련
반면 한때 전국 7대 도시라는 명성을 가졌던 마산과 군항의 도시 진해는 마산회원구, 마산합포구, 진해구 등 구(區)의 명칭만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통합 8년을 넘긴 지금의 창원시는 주력산업 위기로 도시의 쇠락을 우려하고 있다. 창원시는 규모에 걸맞지 않은 행정·재정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특례시’라는 카드를 꺼냈다.◆이합(離合) 거듭하다 다시 ‘창원’
역사적으로 창원은 원래 한 뿌리였다. 조선 태종 때(1408년) ‘의창현(옛 창원)’과 ‘회원현(옛 마산)’을 합해 ‘창원’이라 이름 지어졌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1년 창원대도호부로 승격됐고, 1896년 창원군이 됐다. 이어 1899년 마산포 개항으로 항만도시가 된 마산이 1910년 마산부가 되면서 창원군에서 독립했고 1949년 마산시로 승격했다. 군항으로 입지를 다진 진해읍은 1955년 시로 승격하면서 창원군에서 독립했다.
마산과 진해가 바다를 배경으로 도시를 키워나간 것과 달리 창원은 원주민 중심의 농촌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변화의 계기가 찾아온 것은 산업화다. 국가경제개발 5개년과 맞물려 중화학·기계공업 육성을 위한 신도시로 본격 개발이 시작됐다. 창원국가산업단지 조성과 함께 창원은 어느 도시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1980년 4월1일 창원시 설치 이후 도청 창원 이전(1983년), 도농통합(1995년) 등으로 세를 키웠다. 이합을 거듭하던 창원은 지방행정체제 개편에 따라 2010년 우여곡절 끝에 마산·창원·진해가 창원시라는 이름으로 다시 하나가 됐다. 마산과 헤어진 지 60년, 진해와는 55년 만이다.◆계획도시 창원, 기계산업의 요람
창원을 처음 찾는 사람들은 도심 중앙에 있는 대형 원형광장과 직선으로 곧게 뻗은 왕복 8차로의 창원대로를 보고 놀란다. 창원이 국가 주도의 계획도시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설로 도시의 상징이 됐다.
한촌(閑村) 창원을 한국을 대표하는 공업도시로 만든 큰 그림은 1971년 11월부터 시작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비서실 안에 경제2비서실을 두고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정책, 공장건설 등의 업무를 전담하게 했다. 상공부 차관이었던 오원철 씨가 수석비서관으로 임명돼 대한민국 공업정책을 주도했는데 창원은 호주의 캔버라를 모델로 계획됐다. 국내 최장 직선도로인 13.5㎞, 폭 50m의 창원대로를 기준으로 남쪽에는 창원기계공업기지, 북쪽에는 주거단지를 배치해 ‘직주분리’의 도시 구조를 갖췄다.2010년 창원시 개청 30주년을 맞아 명예시민으로 위촉된 오 전 수석은 “창원은 외부로부터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요새적 지형에다 넓은 구릉지로 공장과 주거시설을 동시에 건설할 수 있어 산업기지로서 최적의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가 주도의 개발계획은 창원의 원주민에게는 가혹한 일이었다. 조상 대대로 물러받은 삶의 터전을 내놓아야 하는 주민들의 민원과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창원상공회의소 31년사에는 ‘산단 조성 초기 보상비는 밭은 평당 700~800원, 논은 3500~6500원, 대지는 최고 1만9000원, 임야는 최고 1600원 등이었으며, 원주민 이주 대책에 따라 용호동과 외동, 두대동이 형성됐다’고 기록돼 있다.
산단 조성 초기 분양은 쉽지 않았지만 1975년 밸브를 생산하는 부산포금의 가동을 시작으로 1970년대 후반에는 금성사, 대우중공업, 기아기공, 한국종합특수강, 부산제철, 삼성중공업 등의 대형업체들이 들어서면서 창원국가산단은 기계공업의 메카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975년 15억원과 60만달러에 불과했던 산단 입주업체들의 매출과 수출 실적은 1979년 4506억원과 165만달러로 급성장했다. 창원국가산단이 활성화하면서 옛 창원시는 1989년 당초 계획했던 인구 30만 명에 도달했고 1994년 40만 명, 2007년 50만 명을 넘어섰다.◆기초지자체 한계 넘어 특례시 추진
국가공업기지와 계획도시 조성 40년을 넘기면서 창원은 도시기반시설 노후, 아파트 재건축 문제, 건강과 문화·환경 등에 대한 시민욕구 증대 등 새로운 변화에 직면했다. 통합시 출범 이후 남아 있는 지역 갈등에다 주력산업의 위기로 도시의 성장세도 한풀 꺾였다. 가장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은 인구 감소다. 통합창원시 출범 당시 110만 명에 육박했던 인구는 약 106만 명으로 줄었다.
지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창원국가산단의 활력도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조선업 불황에 경기 침체가 겹치면서 창원국가산단 가동률은 2016년 89.7%에서 지난해 83.5%로 낮아졌다. 2016년 2분기 11만4000명이던 고용보험 대상 근로자도 4000명이나 줄었다.
시는 기업친화정책과 첨단산업으로의 구조 개편 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기초자치단체 역량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민선 6기부터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도시 규모에 걸맞게 창원을 광역시로 승격해달라는 요구였다.그러나 광역시 승격은 관련법이 발의되기는 했지만 많은 반발에 부딪혔고, 민선 7기 허성무 시장은 실현 가능성이 높은 ‘특례시’로 방향을 전환해 추진하고 있다. 허 시장은 “특례시 법제화와 통합창원시 정체성 재정립을 통해 도시 성장의 뼈대를 다시 세우겠다”고 강조했다.
창원=김해연 기자 hay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