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사라진 영어마을…적자 시달리다 귀농학교로 간판 바꾸기도

애물단지 된 영어마을

전국 28개 영어마을 중 11개가 폐쇄·용도 변경

영어교육 청사진 없이 시설만
2004년 첫 안산 영어마을 이후
지자체들 우후죽순 베끼기
서울서만 800억 투입 3곳 조성

학생 발길 끊기며 적자 '수렁'
교육의 질 부실에 비싸고 멀고
무자격 원어민 강사 논란까지

991억 들인 파주 영어마을
적자난에 아이돌 기숙사로 쓰여
< “영어마을 없어졌어요” > 경기 성남영어마을이 있던 성남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입구에서는 영어마을 간판을 찾을 수 없었다. 2005년 성남시는 연수원 3개 동(약 6087㎡)을 임대해 출입국심사장, 병원 등 생활·문화체험실을 갖춘 성남영어마을을 조성했지만 재정 부담으로 2014년 문을 닫았다. /구은서 기자
주말인 지난 7일 포털사이트 지도에 나온 경기 성남영어마을을 찾아갔다. 성남시청이 있는 시내에서 성남영어마을로 가려면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40분쯤 가야 했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영어로 조잘거리는 학생들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안에 조성됐던 영어마을은 사라지고 없었다. 연수원 관계자는 “2014년 영어마을이 문을 닫은 뒤 영어마을 공간은 연수원 시설로 이용 중”이라며 “오래전 일이라 왜 문을 닫았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적자에 시달리는 영어마을
영어마을은 초·중·고교생 등 청소년 및 어른들이 생활밀착형 영어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외국공항 입국심사대나 쇼핑몰, 병원을 본뜬 체험시설에서 원어민 교사와 대화하며 자연스레 영어를 익히도록 한 게 특징이다. 2004년 경기도는 “학생들이 외국에 나가지 않고도 저렴한 비용으로 해외연수 효과를 볼 수 있게 하겠다”며 국내 최초로 안산영어마을을 설립했다. 화제가 되자 다른 지역에서도 경쟁적으로 영어마을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어진 영어마을은 전국에 28개에 달했다. 설립비만 1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경기도가 파주영어마을 한 곳을 짓는 데만 991억원이 투입됐다. 그러나 운영난으로 영어마을 28개 중 11개가 문을 닫았거나 성격을 바꿨다. 운영 중인 영어마을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한국경제신문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는 수유, 관악, 풍납영어마을을 짓는 데 각각 367억원, 308억원, 121억원 등 총 796억원을 투입했다. 그러나 최근 5년간 수유영어마을은 32억45000만원, 관악영어마을은 2억7900만원의 적자를 냈다. 풍납영어마을은 지난해 ‘창의마을’로 간판을 바꿨다.

경남 창녕영어마을은 설립에 31억원이 투입됐다. 그런데도 창녕군청은 지난해 방문객 수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창녕군은 창녕영어마을에 올해도 예산 5억원을 지원했다.

한 영어마을 관계자는 “외국 시내를 본뜬 영어마을의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으려는 인터넷 쇼핑몰 관계자, 모델만 붐빈다”며 “영어마을이지만 영어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발길 끊긴 영어마을…왜?

전문가들은 2000년대 초 각 지방자치단체가 앞다퉈 영어마을을 지으면서도 정작 교육의 질은 보장하지 못한 게 영어마을이 외면받은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게 원어민 강사의 자질 논란이다. 외국인이 국내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려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국가 출신으로, 학사 이상 학위와 교육 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부 영어마을에선 무자격 원어민 강사가 수업하다가 적발되는 사례가 반복됐다. 학생들이 합숙을 하는 영어마을 특성상 학부모의 불신은 더욱 커졌다. 경기영어마을에서는 교사가 학생을 성추행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애초에 교육적 효과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학과 교수는 “교육당국이 아니라 지자체가 영어마을을 경쟁적으로 짓다 보니 교육철학이 부재했다”며 “단기간 몰입교육은 학생들에게 방학기간에 동기 부여를 해줄 순 있어도 꾸준히 영어실력을 늘려가거나 학생 눈높이에 맞춰 1 대 1로 교육하기는 어려운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기숙형으로 대규모 영어마을을 조성하다 보니 물리적·시간적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한계도 있다.일부 지자체장이 영어마을을 선거 공약으로 남발하면서 혈세 낭비를 불러왔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역 현황과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무작정 사업을 모방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이돌 기숙사로 쓰인 영어마을

영어마을의 ‘말로’는 제각각이다. 지난 여름 방영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48’에서 한국과 일본에서 모인 아이돌 연습생들이 숙식을 함께하면서 머문 기숙사는 파주영어마을 내 한류트레이닝센터다. 파주 영어마을은 학생들의 발길이 끊기고 적자난에 시달리자 사업을 다각화하기 시작했다.

2014년 영어마을 안에 한류트레이닝센터를 설립했고, 2016년에는 요가강사를 양성하는 아카데미도 세웠다. 결국 파주영어마을은 지난해 ‘체인지업 캠퍼스’로 간판을 바꿔 달고 각종 교육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2008년 설립된 전남 강진외국어타운은 문을 닫은 뒤 강진귀농사관학교로 바뀌었다. 리모델링에는 다시 시 예산이 들어간다. 2015년 설립 6년 만에 문을 닫은 경기 군포국제교육센터는 수년간 방치돼 있다가 지난 5월에야 ‘군포책마을’로 개편됐다. 리모델링에는 시 예산 50억원이 투입됐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