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팬덤의 부활…가장 순수하고 빛나던 순간으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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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 기자의 컬처 insight“다섯 전사 모여줘서 고마워요 H.O.T./ 딴놈이랑 결혼해서 미안해요 H.O.T./ 소녀부터 엄마까지 사랑해요 H.O.T./ 어디에서 무얼하든 영원해요 H.O.T.”
해체 17년 만에 다시 무대 오른
'H.O.T.' 공연에 10만명 몰려
당시 10代들의 감성 투영·분출
1세대 팬덤이 더 강력한 힘 발휘
2주 전 그 환희가 지금도 그들의 심장을 뛰게 하고 있을지 모른다. 17년 만에 ‘오빠’들을 만나러 가는 설렘으로 플래카드를 만들던 그들. 이 플래카드는 지난 13~14일 서울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1세대 아이돌 ‘H.O.T.’의 공연(사진)을 보기 위해 팬들이 대절한 고속버스에 붙어 있었다.H.O.T.는 마지막 공연을 한 지 17년 만에 무대에 올랐다. 세월이 흘러 팬들은 어느새 아이들의 엄마가 됐다. 오빠들 노래를 듣느라 밤잠을 설쳤던 기억이 가물가물해질만도 하다. 지금은 야근하느라 날을 새우거나 아기 울음소리에 깨는 게 일상이 됐다. 그러나 마음만은 변함없는 듯했다. “그때는 토니 부인, 지금은 OO 엄마.” “기다렸어 H.O.T.” 등 절절함을 담은 플래카드들을 꼭 쥔 채 나타난 팬들이 무려 10만 명에 달했다.
비슷한 시간 인근 올림픽체조경기장. 이곳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H.O.T의 라이벌이었던 젝스키스가 13~14일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공연을 했다. 그들은 2016년 컴백했다. 이후 꾸준히 무대에 올랐던 이유 등으로 H.O.T.보단 적은 2만 명 정도의 팬이 모였지만 열기는 못지않았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을 풍미한 두 아이돌 그룹이 시간을 뛰어넘어 또 같은 순간 공연을 하고 12만 명의 팬이 모였다는 점은 국내 가요사에서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1세대 팬덤의 부활’이라고 할 만하다. 일반적인 복고 열풍과는 다르다. 복고는 일정 시대의 다양한 대상과 분야를 두루 조명하는 현상이다. 이와 달리 1세대 팬덤의 부활은 과거 자신이 좋아한 특정 대상과 그에게 쏟은 열정을 그대로 복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팬덤은 나날이 진화했다. 정보기술(IT)이 발전할수록 팬덤도 쉽고 빠르게 형성됐다. 그런데 이런 기술이 가장 미흡한 시기에 구성된 1세대 팬덤이 이후의 팬덤에 비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1세대 팬덤이 형성된 독특한 배경 덕분일 것이다. 이 팬덤은 10대들이 자신의 취향과 의견을 적극 밝히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기폭제는 H.O.T.의 첫 데뷔곡 ‘전사의 후예’였다. “아 니가 니가 니가 뭔데. 도대체 나를 때려. 왜 그래 니가 뭔데.” 부제 자체가 ‘폭력시대’였을 정도로 직설적인 가사의 이 노래는 10대가 사회를 향해 처음으로 메시지를 던지는 수단이 돼 줬다. 당시 10대들은 암울한 시대를 겪고 있었다. 급격한 성장기를 지나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았고 가정과 나라의 혼란을 처음 목격했다. 하지만 이 아픔을 정확히 이해하고 감내하기엔 너무 어렸다. 뭔가를 갈망하는 순수한 욕망은 왠지 사치처럼 느껴졌다.
아이돌의 등장은 이런 억눌린 감정을 한데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아이돌은 10대들에게 ‘이상화된 자아’였다. 사회의 아픔을 말하고 사랑과 행복도 노래하는 자유로운 우상 말이다. 그렇게 1세대 팬덤은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나이, 그러나 가장 아픈 시대를 지나가고 있던 이들이 특정 대상에 감정을 투영하고 분출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그리고 다시 나타난 ‘오빠’들에게 또 열광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어른이 됐지만 자신을 더 숨기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말이다. 밥벌이 때문에 화를 참고, 아이의 울음을 달래주느라 자신의 울음은 터뜨리지 못한다.
H.O.T. 멤버들은 이번 콘서트 마지막 곡으로 ‘빛’을 불렀다. 곡이 다 끝나고도 팬들이 아쉬워하자 “‘빛’ 후렴 부분이라도 함께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후 이 노래는 공연장에 다섯 번가량 울려 퍼졌다. “다 함께 손을 잡아요. 그리고 하늘을 봐요. 우리가 함께 만들 세상을 하늘에 그려봐요.” 아직 못다 그리고 있는 세상이지만, 오빠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목소리를 높여 부르면 가능할 것만 같지 않았을까.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