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익 칼럼] 한국, 더 열고 더 융합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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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영국→미국으로 경제패권 이동했듯세계 경제사에서 부(富)는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경제적 패권 경쟁은 15세기 말 신대륙을 정복하며 최고의 영화를 누린 스페인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스페인은 아랍인과 유대인을 추방해 돈과 인재가 떠나면서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유럽에서 정치적으로 줄타기를 하며 세력을 키웠던 프랑스도 비슷한 시점에 국가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신흥 상공인이 주축이 된 신교도 세력이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으면서 대규모 엑소더스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풍요에 안주해 창의·혁신 못 이루면 쇠락할 뿐
다른 생각 포용하고 기업 활력 제고에 힘써야
조환익 < 한양대 특훈교수, 前 한국전력 사장 >
이렇게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쫓겨난 아랍인, 유대인과 신흥 상공인의 일부는 스위스로 건너가 시계 등 정밀공업을 일으켰다. 대다수는 땅이 좁고 저지대 침수지역으로 환경이 열악했지만 사상·종교·문화적으로 자유롭고 이민족을 포용한 네덜란드로 이주해 그곳을 역사상 가장 부유한 나라로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이를 기반으로 세계로 영향력을 뻗쳤다. 당시 일본 지도자들은 재빨리 개항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경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텄다.그러나 네덜란드도 점차 경제에 거품이 끼기 시작했고, 급기야 튤립 한 뿌리가 집 한 채 가격과 맞먹을 정도로 투기 광풍이 몰아치면서 서서히 가라앉았다. 더욱이 치솟는 임금과 세금, 힘든 일을 기피하는 분위기 탓에 직물업, 조선업 등 제조업 공동화 현상까지 생기면서 세계 경제의 패권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네덜란드의 기술인력과 제조업은 당시 유럽 각국의 하청기지 역할을 하던 영국으로 옮겨가고 이는 영국을 산업혁명의 발상지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도 보물선 인양, 주식·채권 투기 등으로 인해 제조업 강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유대인이 중심을 이뤘던 기술과 자본, 특히 창의력은 청교도 정신의 신대륙 미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100년이 넘도록 미국이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세계 경제사는 다른 민족 및 다른 생각과 믿음을 포용하고 융합시켜 창의와 혁신으로 동력화함으로써 제조업을 일으키고 기업인을 존중한 나라는 융성하고, 반대로 이념에 갇혀 융합을 이루지 못한 채 풍요의 자만 속에서 제조업 기풍을 소홀히 한 나라는 결국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 추락의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이런 경제사의 진리를 꿰뚫고 있는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계 경제의 패권을 놓지 않으려 할 것이다. 어떤 다른 경제 세력이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도달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리 없다. 그것이 30여 년 전의 미·일 통상마찰이고 지금의 미·중 무역전쟁의 근본 원인이다.
한국은 한때 몇 개 산업 부문이 세계 1위를 차지하는 등 내심 세계 경제 주도 국가 대열에 올라설 수 있으리란 꿈을 꾸기도 했다. 지금은 그 꿈에서 한참 멀어졌고 선진국들의 감시의 눈에서도 멀리 벗어나 있는 듯하다. 거의 모든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과 힘겨운 경합을 하고 있는데 특히 미래산업 분야에서는 한참 뒤처져 있다. 이웃 일본은 다시 제조업 르네상스를 구가하며 일자리보다 일손 구하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 됐는데도 말이다.
한국은 세계 경제사적 교훈을 되새기고, 우선 나라를 더 열어야 한다. 아시아, 동유럽, 러시아 등 중진국의 과학기술 인력을 적극 유치해야 한다. 이민 정책과 외국인 투자유치 정책도 더 개방적으로 운영하고 국내 거주 외국인이 한국을 제2 조국으로 느낄 수 있게끔 포용정책을 펼쳐야 한다. 아울러 관용과 융합정책으로 국내 기업을 감싸주고 기업의 경쟁력을 저해하는 모든 갈등 요소를 국가가 팔을 걷어붙이고 해결해줘야 한다.
기업은 그간의 자만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런저런 탓만 하지 말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국민의 사랑을 얻어야 한다. 국가와 사회 모든 분야에서 괴짜와 천재를 발굴하고 양성해 창의와 활력이 시장과 전 산업에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기를 바란다. 이제 개방과 융합으로 잃어버린 시간의 공백을 채워넣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