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무릅쓴 안티고네의 선택…'이성'을 뛰어넘는 '인간다움'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25) 로고스 찬양

로고스와 미토스
세상을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실용적인 사고방식 '로고스'
인간 마음속의 인간적인 삶
감정·정신·영혼 깨우는 '미토스'

크레온이 선택한 '로고스'
先王에 대한 성대한 국장과
반역자에 대한 가혹한 조치로
자신의 테베왕권 강화 노려

안티고네의 '미토스'
가족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그를 제대로 장례 치르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행동
이탈리아 화가 크리스토파노 델 알티시모(1525~1605)가 그린 초상화 ‘조반니 피코 델라미란돌라’(유화, 59×45㎝),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
인류는 오랫동안 우주 작동의 원칙, 자연의 섭리 그리고 인간 본성의 궁극적인 비밀을 탐구해왔다. 많은 문명과 문화는 이것을 ‘진리(眞理)’라고 불렀고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크게 두 가지로 표현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진리를 밝혀내기 위한 두 가지 탐구 방법을 ‘로고스(logos)’와 ‘미토스(mythos)’로 구분해 설명한다. 로고스와 미토스는 본질적이며 대등하다. 하나가 부족한 다른 하나는 진리를 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볼 수 없는 장님이다. 로고스와 미토스는 싸우지 않고 상호보완적이다. 진리라는 아이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서로 신비하게 결합해야 한다.

로고스는 이성(理性)으로, 세상을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실용적인 생각 방식이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우주의 현상이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간결한 추상이다. 그러나 이 이성은 순간의 삶을 살면서 단명(短命)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슬픔, 기쁨, 분노, 안도, 희망, 절망과 같은 인간의 감정을 유발하거나 진정시킬 수 없다.로고스와 미토스

순간을 사는 인간에게 삶의 가치를 알려주는 방식은 미토스다. 이성으로 무장한 현대인들은 미토스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 ‘신화(神話)’로 번역한다. 그러나 신화는 미토스가 가진 독창적이며 심오한 의미를 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진정성을 왜곡하는 오역(誤譯)이다. 미토스는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인간다운 삶,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감정과 정신 그리고 영혼을 훈련시키는 이야기다. 미토스는 프리드리히 니체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융 그리고 알프레트 아들러가 주장하는 심리학의 초기 형태다. 인류의 우주 창조와 인간 창조, 영웅 이야기들은 모두 미토스다.

미토스는 숫자나 개념에 관한 추상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넌지시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미토스는 상징(象徵)이며, 인간이 미토스에 등장한 이야기를 자신의 삶에 적용시켜 그 결과를 응시할 때 ‘참’이 된다. 그것은 예술을 창작하기 위한 창의성과 같은 것이다. 조각가는 정과 망치를 들고 다듬어지지 않은 대리석 조각을 하나씩 덜어낼 때 자신의 창의성을 조금씩 드러낸다. 미토스는 수영을 잘하기 위해 실제로 수영을 연습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물에 들어가 손과 발을 움직이고 숨을 고르게 조절해 오랫동안 연습하지 않는 한 수영을 할 수는 없다.존엄성

서구문명은 오랫동안 로고스를 찬양하면서 자신들의 문명 건설을 위한 중요한 벽돌로 여겼다. 조반니 피코 델라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1463~1494)는 23세에 종교와 철학, 자연철학에 관한 900개 주제를 선별해 르네상스 시대의 기치로 주장했다. 이 중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연설’은 르네상스 사상의 선언서로 불린다. 신플라톤주의자인 피코는 르네상스 사상과 후기 중세 사상들, 신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신비주의를 결합해 중세 시대를 마감하고 르네상스 시대를 연 가교 역할을 한 인문학자다.

피코는 이 연설문에서 인간이 이룩한 놀라운 성과를 찬양한다. 그는 그 성과를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신적인 개성인 ‘존엄성’이라고 부른다. 피코는 인문학이란 범주에 일곱 가지 학문 분야를 포함시켰다. 문법, 논리학, 수사학, 산수, 기하학, 음악, 천문학이다. 인간이 신과 맞먹는 존엄성을 획득할 수 있는 이유는 신이 인간에게 준 지적인 능력인 로고스를 발휘했기 때문이다.테베의 새로운 왕 크레온은 자신이 시작할 문명의 핵심을 로고스로 선택했다. 그는 성대한 국장(國葬)을 통해, 선왕 에테오클레스를 정중하게 모심으로써 도시문명과 질서를 찬양하고 자신의 왕권을 선포할 것이다. 반면 도시문명 파괴를 시도한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처리하는 방식은 다르다. 새 떼와 들개들이 그의 시신을 찢어 먹을 것이다. 폴리네이케스는 로고스의 상징인 도시의 근간을 흔들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짐승과 같다.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지키던 파수꾼이 크레온에게 급히 들어와 알린다. 누군가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끌고 가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렀다고. 안티고네는 도시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크레온의 명령을 어겼다. 왜냐하면 가족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의 시신을 묻는 행위는 로고스를 넘어서는 미토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처사다. 인간은 도시가 건설되고 문자가 등장하기 전부터 인간이었다.

인간의 위대함을 위한 찬가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이 행방불명된 어수선한 상황에서 테베의 원로원으로 구성된 합창대가 인간과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찬가(讚歌)’(332~375행)를 부른다. 이 찬가는 인간의 특징인 로고스를 기리고 노래한다. 인간은 짐승들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고 땅, 바다 그리고 공중을 정복한다. 로고스의 상징은 언어와 생각, 그것을 보장해 주고 장려하는 도시와 법이다. 합창대는 다음과 같이 인간의 로고스 찬양을 시작한다. “세상에 놀라운 것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보다 놀라운 것은 없다. 사람은 사나운 겨울 남풍 속에서도 잿빛 바다를 건너며, 내리 덮치는 파도 아래로 길을 연다. 그리고 신들 가운데 가장 신성하며 무궁무진해 지칠 줄 모르는 대지를 사람은 말의 후손(노새)으로 갈아엎으며, 앞으로 갔다가 뒤로 돌아서는 쟁기로 못살게 군다네.”(332~341행)

인간은 ‘놀랍다’다. 소포클레스는 그리스어 ‘데이논(deinon)’이란 단어로 인간을 정의한다. 데이논은 경외심, 존경심, 공포, 놀라움, 기적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단어다. 크레온과 안티고네 모두의 특징이다. “때로는 악의 길을 가고, 때로는 선의 길을 가는”(367~368행) 인간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단어다. 데이논은 인간의 양극단과 알 수 없는 심오한 마음 상태를 지칭한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말이나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인간은 우주만물 안에서 가장 이상하고 놀랍고 무서운 존재다.

데이논은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다음과 같은 기질이다. 첫째는 ‘미스테리움(mysterium)’, 즉 신비(神)다. 나는 왜 인간으로 태어났는가. 생명은 왜, 어떻게 등장했는가. 과학은 그 이유를 영원히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일부분만 알아갈 뿐이다. ‘신비’한 것은 나를 감동시킬 만한 것,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것을 감추고 있다. 신비의 의연한 절제가 나의 시선을 항상 유혹한다.

둘째는 ‘트러멘둠(tremendum)’, 즉 전율(戰慄)이다. 전율이란 오감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경험할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이다.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나를 응시하고 있는 늑대를 봤을 때 내 몸과 마음이 반응하는 방식이 바로 전율이다. 리더는 나를 가만히 관찰해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바라본다. 그의 안목은 강력하며 자비로워 내 마음을 훔쳐간다. 숲에서 헤매고 있는 내게 우아하고 민첩하게 접근해 나를 인도한다. 나는 두렵지만 그에게 기꺼이 승복한다.

셋째는 ‘파시난스(fascinans)’, 즉 매력(魅力)이다. 매력이란 사람을 끄는 아우라다. 리더는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터부’를 경험한 후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소유로 만든다. 사람들은 그 터부에 비이성적으로 끌린다. 매력을 지닌 장소, 시간, 물건, 사람은 곁에 두기는 부담스럽지만 인간의 충성을 자연스럽게 요구하는 신비한 자석(磁石)과도 같다. 매력은 나와 너의 경계를 가물가물하게 하는 신비한 돌, 자석이다.

인간이 자연과 동물을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언어’와 ‘생각’을 지녔기 때문이다. “언어와 바람처럼 날랜 생각과 도시에 질서를 부여하는 심성을 사람은 혼자 힘으로 습득했다. 그리고 맑은 하늘 아래서 노숙하는 것이 싫어지자 서리와 폭우의 화살을 피했다. 사람이 대비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런 대비 없이 사람이 미래를 맞이하는 일은 없다. 다만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수단만 손에 넣지 못했다.”(353~360행)

원로원은 크레온의 칙령을 테베라는 도시문명에 질서를 부여하는 언어와 생각이라고 찬양한다. 인간은 로고스를 스스로의 힘으로 터득해 찬란한 문명을 이뤘다. 그러나 이 노래는 인간이 아직 정복하지 못한 한 가지를 아쉬워하며 언급한다. 인간은 그 앞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비참한 존재다. 바로 죽음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로고스인가? 인간이 결국 마주칠 수밖에 없는 죽음 앞에서, 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 혹시 미토스가 아닐까?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