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본능과 농부의 땀방울, 탐스런 사과에 풀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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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그림 15년…노화랑서 개인전 여는 윤병락 씨정교한 묘사의 극치를 보여주는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의 40대 대표작가 윤병락 씨(47)가 사과 그림에 꽂힌 지 올해로 정확히 15년이 됐다. 경북 영천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소중한 땀방울을 보며 사과를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2003년이다. 생산되고 창조되는 모든 것은 무한한 정열과 에너지를 쏟아야 사랑이 깃든다는 걸 느껴 붓을 들었다. 어렵기 짝이 없는 ‘머리로 그린 미술’에 지친 사람들에게 ‘손으로 그린 그림’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5일 시작해 20일까지 서울 관훈동 노화랑에서 펼쳐지는 윤씨의 개인전은 지난 15년 동안 사과 그림에 몰두한 작가의 열정과 예술 철학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자리다. 1, 2층 전시장을 가득 채운 20여 점의 대형 사과 그림은 극사실적 기법과 사과 상자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으로 사과를 포착한 근작이다.경북대 미대 4학년 재학 중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으로 당선될 정도로 묘사력이 뛰어난 윤씨는 전시회 때마다 컬렉터들이 몰려 작품이 완판되는 몇 안 되는 ‘행복한’ 작가다. 일반 그림보다 수십 배 노동집약적 작업인 데다 현대인들의 모방 본능을 사과에 표현하는 독창성 때문에 국내외 아트페어에 출품하기 무섭게 팔려나간다. 작품 주문이 밀려들며 내년 말까지 예약이 끝난 상태다.
윤씨는 “미술계에서 쌓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내년에는 미국 유럽 홍콩 등 해외 진출을 준비할 것”이라며 “교과서에 영원히 실리는 작가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그의 사과 그림은 한국화의 기본 지침인 기운생동(氣韻生動·멋), 골법용필(骨法用筆·필력), 응물사형(應物寫形·사생), 수류부채(隨類賦彩·채색),경영위치(經營位置·구도), 전모이사(傳模移寫 ·모방과 창작)를 따르며 서양의 유화 물감을 사용한다. 이른바 전통에 바탕을 둔 ‘극사실주의’인 셈이다. 이 때문에 그의 그림은 현재 중·고등학교 미술, 국어교과서 등 8곳에 실려 있다.
‘윤병락 표’ 사과 그림이 관람객들에게 포근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요인은 세대를 아우르는 ‘결실과 풍요’를 감성적으로 터치하는 것이다. 결실의 계절에 느끼는 포만감과 풍부한 감성의 나래를 상상의 밑뿌리로 어루만진다. 작품 제목이 모두 ‘가을 향기’인 것도 이 때문이다.현대인들의 향수를 자극한 것도 한 요소다. 그의 사과 그림에는 인간의 풍요와 욕망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잔잔한 빛과 색감이 화면 깊숙이 끼어들고 정적과 평안, 고요를 마음껏 발산한다. ‘사과보다 더 사과’ 같은 그래서 사진인 듯 보이는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것이 곧 사실이라는 믿음을 흔들어 놓는다.
기법의 특이함도 미술 애호가들을 끌어들이는 또 다른 요인이다. 나무판 위에 삼합지 이상의 두꺼운 한지를 붙이고 그 위에 유화물감으로 2~3차례 덧칠을 한다. 작업실에서 사과를 깎기도 하고 궤짝을 옆으로 쏟기도 하면서 다양한 구도를 만들어낸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