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쌍코뺑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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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32
이경춘 < 서울회생법원장 leek@scourt.go.kr >나에게는 육친은 아니지만 때가 되면 늘 그리운 형이 한 분 있다. 내 고향 해남을 갈 때면 으레 거치는 곳이 영암이고, 그곳에는 모두가 아는 걸출한 월출산이 웅장하게 솟아 있다. 가을이 익어 벼이삭이 고개를 숙일 무렵이면 주변 들판이 모두 황금색으로 물드는데, 그 무렵 그곳을 지나갈 때면 특별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그곳에 그렇게 솟았을까 하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그 월출산 기슭이 고향인 형과의 깊은 인연도 바로 그곳에서 시작됐다.
언제까지나 세상 걱정을 들려주며 가까이 계실 줄 알았던 형은 내가 서울 생활을 시작한 직후 미국 이민을 결행했다. 여유 있는 살림을 일구지는 못한 듯한데, 그리울 만하면 ‘조국’을 둘러보러 온다. 관심과 걱정은 한결같다. 우리 사회가 잘돼갈지, 북한과 북한 동포의 앞날은 어떨지 등등. 그야말로 우국지사의 모습이다. 미국에서도 집안 건사를 위한 일상이 바쁘고 고단할 것 같은데 한인학교 교장직을 수행한다거나 미주에서 발간되는 한국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동포사회를 위한 일에 더 열중이다.그 열정은 수년 전 도보 국토 순례로 이어졌다. 잠깐이었지만 그 여정 중에 나를 만난 형은 왜 그렇게 조국 산하를 종으로, 횡으로 걸어서 순례를 하는지 말로, 모습으로 전했다. 순례 길에 나선 형은 배낭에 워낭을 달고 다녔다. “워낭소리가 상징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꼭 그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려운 어린 시절 학업을 미룬 채 농사일을 하던 날들을 떠올리기도 했을 것 같고, 느릿하나 꾸준한 소의 걸음걸이를 생각했을 것 같기도 하다. 걸었던 시간들의 마음속 이야기, 그 길에서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를 할 때 원숙한 얼굴이 더욱 깊어지고 환해지는 것을 보면서 나도 그 길을 걸었으면, 그 길 위의 그런 사람들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아마 요즘은 형의 수심이 많이 얕아지고 대신 희망을 채우고 있지 않을까. 쌍코뺑이는 그 형이 어린 시절과 고향의 이야기를 담은 글에 ‘쌍코뺑이를 아시나요’라는 제목을 달아 둔 것을 보고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되뇌던 말이다. 어릴 때 자주 쓰던 말임에도 위 글을 볼 때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 쌍코뺑이는 잃어버렸다 되찾게 돼 가끔 생각이라도 해본다. 그러면서 어느새 이렇게 잃어버리고도 되찾을 단서도 찾기 어려운 말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면 서글프기도 하다. 형 생각이 나는 것을 보니 올겨울에도 한 번은 다녀갈 것 같아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