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에 사로잡힌 우둔한 통치자 크레온 "명령 내리면 복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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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현명(賢明)한 사람은 일상을 그저 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저 본다’는 의미는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실재를 과거의 시선으로 보는 행위다. 과거란 관찰의 주체가 가진 습관, 그가 속한 공동체의 관습, 혹은 자신이 동의한 이념이 굳어져 나의 일부가 돼 버린 군더더기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시도’는 과거의 시선에서 벗어나,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한밤중에 자신의 모습을 총총히 드러낸 별들을 감상하는 마음이다. 그(녀)는 그 순간에 별 하나하나를 칼 세이건의 과학책에서 설명했던, 혹은 반 고흐의 그림에서 봤던 별과 비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의 표현은 밤하늘의 별들을 묘사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읽기 (27) 현명(賢明)
독재자 크레온
테베 왕으로서 권력 쥐게 되자
자신의 말이 곧 법이라고 생각
안티고네를 산골 석굴에 감금
저항하는 아들 하이몬
연인 안티고네 구명위해 항변
"그녀는 명예로운 행동을 한 것
한사람만을 위한 국가 아니다"
현명현명한 사람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보려는 마음을 가다듬고, 두 눈을 부릅뜬다. ‘賢明’이란 한자는 심오하다. ‘현(賢)’자는 눈을 크게 뜨는 모양을 형상화한 한자로 ‘신(臣)’과 오른손을 의미하는 ‘우(又)’로 구성돼 있다. 현명한 사람은 그가 마주친 사물이나 사람을 오른손으로 자꾸 눈을 비벼 크게 떠서 있는 그대로 보려는 것을 자신만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다. ‘賢’자 아래에 돈과 가치를 의미하는 조개 패(貝)가 들어간 이유다. 현명한 사람은 세상이 정해 놓은 편리한 이념인 이분법(二分法)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는 두 눈으로 확인한 것만 믿는다. 그는 나와 너, 선악, 명암, 남녀, 노소, 명암과 같은 구분을 초월한다. 그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것 자체로 보기에 즉흥적이고 매력적이다.
흔히 ‘밝을 명’으로 알려진 한자 ‘明’은 사실 형용모순(形容矛盾)이다. 우리가 보기에 해와 달이 동시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양이 나타나면 달은 자취를 감출 뿐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다. 밤이 되면 오히려 태양이 지구 뒤로 사라지고 낮에 보이지 않았던 달과 별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낮이나 밤이나 하늘에는 항상 해와 달이 공존한다. 현명한 사람은 매순간 과거에 가졌던 자신의 생각, 말, 행동을 포기하고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해 해를 남들이 말한 대로의 해로만 보지 않고, 달을 달로만 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지금 관찰하고 확인한 그것만 믿는 사람이다. 그는 오늘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과거가 돼 내일이면 과감히 유기하고 새로운 믿음을 만들 것이다.
소피아고대 그리스인들도 ‘현명’을 인간과 인간이 구축한 도시문명의 핵심으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어로 현명은 ‘소피아(sophia)’다. 소피아는 기원전 4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플라톤 철학, 헬레니즘 철학과 종교, 영지주의 그리고 그리스도교 사상의 기반이다. 소피아의 의미는 한자 ‘賢明’과 비슷하게 ‘똑똑한, 영리한’이란 의미다. 가장 오래된 그리스 문헌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는 수공업과 예술에 재주가 있는 장인(匠人)의 신인 헤파이스토스와 기술과 직물, 요리의 신인 아테나의 별칭이다. 플라톤 이전에는 경험을 통해 습득된 실질적인 기술에서 터득한 기술을 의미했다. 좀 더 폭넓은 의미의 ‘분별력, 실용적인 지혜’를 의미하는 그리스 단어는 ‘프로네시스(phronesis)’다.
철학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는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을 부르는 용어에서 출발했다. 소크라테스는 델피 신전에서 받은 신탁에서 ‘소포타토스’ 즉, ‘가장 지혜로운’이란 칭호를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칭호를 받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당시 지식을 젊은이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던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했다. 현명함의 시작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시작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전에 등장한 《안티고네》는 소피아의 의미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테베 왕 크레온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는 권력을 쥐자 ‘자신의 말이 곧 법이 된다’고 착각하는 ‘독재자’가 됐다.독재(獨裁)
독재자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타이런트(tyrant)’는 고대 그리스 단어 ‘튀라노스’에서 유래했다. 튀라노스는 현대적 의미의 독재자가 아니라 단순히 ‘도시의 통치자’란 뜻이다. 그러나 후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튀라노스를 나쁜 통치자로, 왕이란 의미의 ‘바실레이오스’를 좋은 통치자로 구별했다. 이 구별은 로마시대로 이어져 라틴어 ‘티라누스(tyrannus)’는 ‘불법 통치자, 독재자’란 의미로 전락시키고 ‘왕, 통치자’는 ‘렉스(rex)’란 단어를 사용했다. 고대 그리스의 튀라노스는 귀족정치와 신정정치에서 벗어나면서 등장했다. 고대 그리스의 왕정과 신정에서 벗어나 민주정으로 가는 길목에 튀라노스 정치가 있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을 독재자로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하이몬의 깨달음테베의 귀족들로 구성된 합창대는 안티고네가 크레온의 칙령을 온 시민이 보는 가운데 거역한 사건을 두고 테베에 또 다른 비극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들은 노래한다. “마치 파도가 트라케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거센 입김에 쫓겨 검은 심연 위를 굴러가며 바닥에서 검은 모래를 파헤쳐 올리고, 바람에 시달리는 해안이 폭풍의 매질에 울부짖을 때와 같다.”(586~593행) 그들은 이미 크레온이 테베의 왕이 된 행운에는 불운도 반드시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의 성공에는 반드시 재앙이 따른다고 노래한다. 성공만을 지향하는 인간의 욕심은 불을 향해 뛰어드는 나방과 같다고 말한다. 인간은 뜨거운 불에 발을 덴 후에야 그 불에 가까이 가지 않는다.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아버지와 사랑하는 연인 안티고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잡지 못하는 유약한 청년으로 등장한다. 그는 크레온 앞에서 지혜로운 아버지의 훌륭한 지도가 자신의 결혼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크레온은 마음이 흔들리는 하이몬에게 말한다. “내 아들아, 너는 마음속에 명심해라. 매사를 아버지 뜻에 따라야 한다.”(639~640행)
하이몬은 그에게 아들이자 테베 시민이다. 크레온은 안티고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것이다. 크레온은 그가 한 말을 번복해 안티고네를 살려주는 것이 자신을 시민들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드는 치욕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테베란 도시에서 독재자일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독재자다. 크레온은 그가 내뱉은 명령과 이념의 노예다. 자유롭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현명한 자가 아니라 우둔한 자다.
그는 말한다. “도시가 임명한 자가 명령하면 크고 작고, 옳고 그르고를 떠나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장담하건대, 그런 사람이야말로 제대로 통치한다. 창의 폭풍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믿음직하고 훌륭한 전우로서 꿋꿋하게 옆에 버티고 서 있을 것이다.”(666~671행) 크레온은 과거에 사로잡혀 그것을 고수하려는 어리석은 자다.
크레온은 가부장적일 뿐 아니라 남성주의적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법질서를 옹호해야 하고 결코 한낱 계집에게 져서는 안 된다. 꼭 져야 한다면, 우리가 한낱 계집에게 졌다는 말을 듣느니 남자에게 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675~680행) 크레온은 왕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성과 여성이라는 위계질서를 고수하는 것이 도시문명을 유지하는 원칙이자 도덕이라고 착각한다.
하이몬은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다. 신은 인간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선물로 줬다. 하이몬은 크레온의 아들이 아니라 안티고네의 연인으로서, 테베의 시민으로서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신 전한다. “보통 시민들은 아버지의 눈초리에 주눅이 들어 아버지 면전에서는 귀에 거슬리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어둠 속에서 그 소녀를 위해 이렇게 애통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모든 여인들 중에 가장 죄 없는 그녀가 가장 영광스러운 행위 때문에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 하다니! 친오빠가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쓰러졌을 때, 날고기를 먹는 개 떼나 어떤 새가 먹어 치우도록 묻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 그녀야말로 황금과 같은 명예를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691~699행) 하이몬은 대담하게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고 충고한다.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하이몬 면전에서 죽이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하이몬은 퇴장한다.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막지 못하는 무기력함과 아버지 크레온의 무지막지한 행위를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중 깊은 석굴로 데려가 감금한다. 크레온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의 주인은 왕이라는 직책과 체면이다.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린 비극의 장본인은 바로 그 자신이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