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독립운동가 이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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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1905년 11월17일,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뺏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분개했다. 한성부 명문가 집안의 이회영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보낼 것을 고종에게 건의했다. 이회영은 1867년 한성부 저동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여섯 아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의 10대손이다. 그는 장훈학교와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계몽운동을 펼쳤다.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신민회 창설멤버로 참여했고, 신(新)문물을 가르치고 항일 민족교육을 하는 기관인 서전서숙을 세웠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여섯 형제와 그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로 갔다. 전 재산을 모두 팔아 마련한 40만원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했다. 이 자금을 현재 가치로 따지면 600억원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1911년에는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다.그는 1931년 조선 무정부주의자 조직인 항일구국연맹과 비밀행동조직인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일본 관료들을 위협했다. 1932년 다롄으로 이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60대 노인이던 그는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그해 11월17일 순국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정확히 27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회영 형제 중 5형제가 독립운동 과정에서 순국했다.
홍윤정 기자 yj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