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뒤덮은 '노란 조끼' 물결…마크롱, 취임후 최대 위기

17일 佛 전역서 28만8천명 쏟아져나와 고유가·유류세 인상 항의
파리 개선문·고속도로 출입구 등 교통마비…경찰 최루탄 쏘며 진압
민심 달래기 행보 효과 미미…마크롱 국정지지율 25%로 저점 또 찍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취임 후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내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프랑스 극우정당이 집권당을 누르고 1위를 할 것으로 예상한 여론조사가 최근 나온 데 이어, 유류세 인상에 항의하는 전국 규모의 '노란 조끼' 집회의 파괴력은 예상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마크롱은 며칠 전부터 여론의 향방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이전 태도와는 확연히 달라진 '민심 달래기' 행보에 나서고 있지만, 효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노란 조끼 부대가 프랑스 전국 도심의 주요 로터리와 고속도로 입구 등을 마비
시키는 파괴력을 보여준 가운데 마크롱의 국정지지율은 취임 후 최저인 25%까지 추락했다.◇유류세 인상 항의해 佛 뒤덮은 노란 조끼…1명 사망, 400여명 다쳐
17일(현지시간) 프랑스 전역 도심 주요 길목의 로터리와 고속도로 출입구들은 노란 조끼를 입은 시위대에 거의 점령당했다.

프랑스 내무부에 따르면 이날 하루 동안 전국 2천 곳 이상에서 유가 상승과 정부의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려 최소 28만8천 명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프랑스는 지구온난화 대처와 친환경 경제로의 전환을 목표로 유류세를 꾸준히 인상했다.지난 1년간 경유(디젤) 유류세는 23%, 일반 가솔린 유류세는 15%가 올랐다.

농촌 유권자와 화물차량 운전자들은 이를 생계의 위협으로 인식하고 대규모 항의집회를 준비해왔다.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정차 시 사고 예방을 위해 운전자들이 착용하는 노란 조끼를 입고 일주일 전부터 전국 곳곳에서 자발적 항의집회를 열고 있는 이들에게는 '노란 조끼 운동'이라는 별칭이 붙었다.이날 수도 파리에서도 노란 조끼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마크롱 퇴진' '부자들의 대통령' 등의 문구를 조끼에 적어 넣고 주요 도로를 점거했다.

파리 개선문의 로터리도 몇 시간 동안 시위대에 점거돼 교통이 마비됐고, 경찰은 개선문과 대통령 관저·집무실인 엘리제 궁 인근의 샹젤리제 거리에서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강제 해산했다.
파리·마르세유 등지에선 도심 곳곳에서 운전자들과 시위대가 충돌하며 몸싸움도 벌어졌다.

이날 시위에서는 사망자도 나왔다.

프랑스 동부 알프스 산간지역인 샹베리에서는 시위를 나온 63세 여성이 당황한 여성운전자의 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고, 전국에서 400명 이상이 시위 과정에서 차량에 부딪히는 등 다쳤다.

노란 조끼 운동은 마크롱 정부에 비수를 들이대고 있다.

단순히 현 정부 정책에 불만이 큰 유권자들이 소수 모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전국적인 대규모 집회로 비화하자 프랑스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 운동이 평소의 정치적 성향과 거의 관계없이 유권자들의 고른 지지를 받는 것도 마크롱에게는 뼈아픈 일이다.

리서치업체 엘라베의 긴급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3%가 이번 시위를 지지한다고 답했다.

유력지 르 몽드는 "프랑스 노조들의 외면을 받은 유권자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고 특별한 구심점도 없는 이 노란 조끼 운동 앞에서 마크롱은 속수무책"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이번 시위에 앞서 프랑스 정부는 부랴부랴 저소득층 자가용 운전자 세제혜택, 디젤차 교체 지원금 확대, 에너지 보조금 수혜 가구 확대 등 '민심 달래기' 정책들을 내놨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극우정당에도 밀리는 마크롱, 재선가도 벌써 적신호…"달라지겠다" 호소
마크롱도 여론의 기류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노란 조끼 집회 사흘 전인 지난 14일 생방송 인터뷰에서 "그동안 국민께 충분한 관심을 쏟지 못한 것 같다"며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여론에 더 귀를 기울이고 변화된 모습을 보이겠다는 대통령의 약속도 고유가로 살림살이가 팍팍해진 유권자들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던 마크롱의 국정지지율은 이런 국면에서 또 저점을 찍었다.

프랑스여론연구소(IFOP)와 주간지 르 주르날 뒤 디망쉬가 유권자 1천957명을 대상으로 9~17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마크롱의 국정 지지도는 한 달 전보다 4%포인트 빠진 25%로 나타났다.

특히 마크롱의 지지율 낙폭은 여러 직종 중에서 블루칼라노동자·소상공인 사이에서 한 달 만에 9%포인트가 급락해 서민층의 실망감이 큼을 여실히 보여줬다.

마크롱을 더 긴장시키는 일은 따로 있다.

최근 발표된 내년 유럽의회 선거 관련 여론조사에서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IFOP가 이달 4일 발표한 여론조사는 극우 국민연합(RN·'국민전선'의 후신)이 마크롱의 집권당 '라 레퓌블리크 앙마르슈'(LREM·전진하는 공화국)를 누르고 내년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1위를 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 선거는 마크롱이 집권한 뒤 사실상 처음 치르는 일종의 '중간평가'다.

프랑스의 다른 야당도 아닌 극우정당이 1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은 극우를 꺾고 집권한 마크롱에게는 더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크롱과 프랑스 정부의 '변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곤두박질하는 국정지지율을 유럽의회 선거 전까지 회복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결합해 위력을 과시한 노란 조끼 운동이 예상보다 훨씬 큰 파괴력으로 마크롱의 목을 옥죄는 가운데, 마크롱의 경쟁진영도 점차 세를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크롱의 신당 LREM은 농어촌 산간지역에서 풀뿌리 네트워크가 전혀 없는 반면에, 오랜 전통의 사회당과 공화당은 단단한 지역 기반을 바탕으로 재기를 모색 중이다.

극우 국민연합은 대도시의 리버럴 엘리트들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포퓰리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란 조끼 운동이 확대돼 지방과 농촌 유권자들의 민심을 잃으면 2022년 마크롱의 대선 재선은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수세에 몰린 마크롱은 기존의 중도개혁 노선을 계속 이어가되 '오만한 부자들의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떨치고 대국민 설득노력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엘리제 궁 관계자는 최근 르 몽드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시민들과의 접촉 기회를 크게 늘릴 것"이라며 "주요 각료들에게도 지방현장 방문을 더 많이 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