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유배지, 항일의 섬

여행의 향기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신지도

홀로 걷는 백사장 3.8km
행복이 파도처럼 밀려오네
고즈넉한 신지도의 분위기와 묘하게 어울리는 섬 고양이들
마을마다 과녁을 세워두고/ 농한기면 성대하게 모임을 갖나니/ 글 띄워 이웃 마을사람들 청해/ 날 받아선 다투어 예법을 차리고/ 기일이 되면 자리를 벌여/ 구경꾼이 마을을 이룬다/ 진수를 내어오면 청년들은 으스대고/ 어린아이들은 그저 즐겁고/ 성년이 된 이들이 둘씩 화살을 쏘면/ 북소리 요란하여 웅크린 용이 놀랄 정도/ 숲에 그림자 질 때 겨루기 끝나고/ 우승자 셋이 우뚝 서면/ 선배들이 서로 불러내어/ 얼굴에 얼룩덜룩 칠해주고는/ 높은 장대에 그림종이 걸고서/ 노래하며 떠들며 집집마다 들어간다/ 어른들은 경사 났다 잔칫상 벌이고/ 문권 만들어 좋은 밭을 떼어주며/ 사흘을 실컷 놀다보니/ 배우에 풍각장이 모두 모이는데/ 이웃 마을이 자리를 또 마련하면/ 서로 가서 급한 일 돕듯하다/ 서울과 멀리 떨어져 과거는 아예 꿈도 못 꾸어/ 벽촌에서 출세욕을 아주 끊었기에/ 이 풍습이 오래도록 전해왔구나/ 순후한 이 풍속을 비웃지 마오/ 나는 세상을 대신하여 읍례하려오.

신지도 풍속을 노래한 원교 이광사 ‘기속(記俗)’ 제7수
신지도 최고 풍경으로 꼽히는 명사십리 해변. 이곳 백사장의 모래찜질은 관절염과 신경통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신지도는 유배의 섬이었다. 조선시대 많은 섬들이 그랬듯이 신지도 또한 유배지로 이용됐다. 섬이 곧 감옥이었다. 신지도에는 갑술옥사, 신유사옥 등 정치적 이유로 유배된 이들이 가장 많았지만 더러 살인자나 도적이 유배되기도 했다. 조선은 종주국으로 섬겼던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률》에 근거해서 유배를 실시했는데 가장 원거리 유배가 3000리 유배형이었다. 하지만 땅이 좁아 3000리 유배를 실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생긴 꼼수가 생겼다. 한반도를 한 바퀴 돌게 해 3000리를 채운 뒤 유배를 시키기도 했고, 섬으로 유배를 보낼 때는 거리를 더 쳐주는 편법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섬의 거리에 따라 1000리, 2000리, 3000리로 쳐주었는데 신지도의 경우 3000리 유배지였으니 중죄인들의 유배지였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관찬 서류를 통해 확인된 신지도 유배자는 38명, 개인 기록 2명을 포함하면 총 40명이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와 이세보의 《신도일록(薪島日錄)》 등 개인 기록을 통해 확인된 유배자는 관찬보다 5명이 더 많은 45명이다.

이광사, 지석영 등의 유배지로 유명신지도 유배객으로 유명한 이들은 조선 후기의 문신 목내선(睦來善), 동국진체의 완성자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시조 시인 이세보(李世輔), 조선 후기 천연두 예방법인 종두법을 전파한 문신이자 개화사상가, 한글학자였던 지석영 등이 있다. 이제 대부분의 유배객들 흔적은 간 곳 없고 이광사가 지내던 가옥 정도만 남았다. 이광사는 해남 대흥사의 대웅보전 현판 글씨를 썼다. 그런데 이 현판은 한 차례 떼어내졌다가 다시 걸린 사연으로 유명하다. 제주 유배 길에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이 현판을 보고 못마땅해서 초의 선사에게 일갈했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인데 어떻게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걸어놓을 수 있는가.” 하지만 9년 뒤 유배가 풀려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현판을 다시 달아 달라”고 했다. 9년의 유배살이가 추사를 더 겸손하게 만든 것일까.
원교 이광사가 심었다는 250여 년 된 원교목
추사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원교는 끝내 유배지인 신지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광사는 신지도에서 서예 이론서인 《서결(書訣)》을 지었다. 그의 유배는 서남해안의 서예문화 부흥에 기여한 바가 컸다. 이광사가 신지도에서 숨을 거두고 14년이 지나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 왔고 다산의 작은형 손암 정약전도 신지도에서 8개월 동안 유배를 산 뒤 흑산도로 이배됐다. 다산이 신지도에 유배 살던 손암에게 보낸 시 2편이 전해진다.

다산은 ‘탐진 풍속 노래’라는 시에서 “글시방이 옛날에 신지도에 열려 있어 아전들 모두가 이광사에게 배웠다네”라고 노래했다. 완도 지방 아전들이 모두 이광사에게 서예를 배웠음을 알려주는 귀한 기록이다. 그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적거지가 신지도 금곡리에 남아 있다. 8칸짜리 전통 한옥은 300년 전쯤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새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지금의 주인은 30년 전부터 기거 중이다. 풍상을 견디지 못한 낡은 한옥은 살짝 기울었다. 집 앞에는 원교 적거지 안내판 하나 없다. 금곡 마을 앞에는 원교가 심었다는 250여 년 된 원교목(円嶠木)이 아직도 정정하게 서 있다.
신지도는 조선시대 가장 거리가 먼 3000리 유배지로 이용됐다.
신지도 유배 일기인 《신도일록》을 쓴 경평군 이세보는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은 시조를 쓴 문신인데 458수의 시조를 남겼다. 그 대부분이 신지도에서 쓴 것들이다. 선조의 9대손인 이세보는 철종의 사촌 동생이기도 하다. 이세보는 당시 권력의 중심이던 안동 김씨들의 전횡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1860년 11월 신지도로 유배됐는데 1863년 고종의 즉위로 해배될 때까지 송곡에서 2년 동안 위리안치(圍籬安置) 생활을 하며 유배 기록인 《신도일록》을 남겼다. 이세보가 지은 458수의 시조 중 《신도일록》에 95수의 한글 시조가 수록돼 있는데 이는 대부분 신지도 유배 시절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세보는 해배 후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의 벼슬을 지냈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듣고 통곡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애달픈 사연과 사랑의 노래

신지도 유배시절 이세보가 명사십리 모래밭에 시를 쓰고 낭송하는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 같아서 주민들이 해변의 이름을 명사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의 시조에는 관리들의 탐학을 비판하고 사랑을 노래한 것이 많다. 그가 신지도에서 썼던 시조 한 자락이 가슴을 울린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예술의 원천이다. 상사별곡(相思別曲).“가슴의 불이 나니 애간장이 다 타네

인간의 물로 못 끄는 불 없건마는

내 가슴 태우는 일은 물로도 어이 못 끌까!

나날이 다달이 운우지락에 사랑하며

산골짝 맑은 물이 증인 되고

천년 만년이자 맹세했것만

못 보아도 병, 더디 와도 애가 끓는구나!“
신지도 최고 풍경으로 꼽히는 명사십리 해변. 이곳 백사장의 모래찜질은 관절염과 신경통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석영은 호가 송촌(松村)인데 그의 유배지가 송곡리였다. 지석영은 우두의 임상실험을 끝낸 뒤 《신학신설(新學新說)》을 완성했는데 이 의학서를 완성한 곳이 바로 송곡리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석영은 호를 송촌으로 했다. 다산의 기록에는 장씨 집안의 여자가 신지도에 유배된 기록도 있다. 인동부에 살던 장현경과 그의 아버지, 인동부사 사이에서 국상(國喪) 후 잔치를 여는 문제로 다툼이 있었는데 결국 장현경이 망명해 버렸다. 그 후과로 장현경의 처와 딸 2명, 아들 1명까지 전 가족이 신지도로 유배됐다는 내용이다. 유배 중 장현경의 큰딸이 수군진 군졸의 유혹에 시달리다 자결해 버렸고 이를 처리하는 과정도 기록돼 있다. 당시 유배인들이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다.

소안도와 함께 서남해 항일운동의 전초기지

신지도의 대표 요리 장어두루치기
원래 신지도는 지도(智島)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나주목에 지도(현 신안군 지도읍)라는 같은 지명이 있다 보니 문서를 왕래하면서 지명을 혼동하는 일이 많아 신(薪)자를 붙여 신지도라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신지도는 면적 30.8㎢에 3600명이 사는 제법 큰 섬이다. 신지도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삼국시대에는 백제, 통일신라 말기에는 청해부에,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장흥부에 속했다가 이후 강진현에 속했다. 1522년(중종 17년) 송곡리에 신지만호진이 설치됐지만 1895년 군제 개편으로 신지만호진이 없어졌고, 1896년 완도군이 설군되면서부터는 완도군에 속해왔다. 조선시대에는 국영목장으로 사용됐는데 지금도 마장터가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신지도는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인 소안도와 함께 서남해 항일운동의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지도 출신 독립운동가가 많다. 소안도의 사립 소안학교가 그랬던 것처럼 신지도 독립운동의 중심은 사립 신지학교였다. 결국 독립운동가 양성의 산실인 신지학교를 불온시 여긴 일제에 의해 교원 2명이 경찰에 체포된 후 강제 폐교당했다. 신지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임재갑(1891~1960), 장석천(1903~1935) 선생 등인데 임재갑 선생은 신지도 임촌 마을 출신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청년학우회와 구국청년계몽회에 가입해 연락 요원으로 서울과 북간도를 왕래하면서 항일운동을 했다. 소안도에서 만들어져 전국 조직이 된 비밀결사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의 조직원으로도 활동했다. 간도 용정 대성학원 교원으로 일하며 독립자금 모집책으로 수회에 걸쳐 국내를 왕래했고 또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무장전투요원으로도 활동했다. 1925년 보안법 위반으로 10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신간회 완도지회장을 지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300년 전쯤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원교 유배가옥
장석천 선생은 신지도 송곡 마을 출신인데 신간회 광주지부 상무간사로 활동하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9년 11월3일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장재성, 박오봉, 강석원, 국채진 등과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고 학생운동을 지원했으며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항일 투쟁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 2만 장을 비밀리에 인쇄해 전국으로 발송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돼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항일투쟁을 계속해 경성방직 공장 종업원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했으며, 소요 배후 조종자로 체포돼 다시 2년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고운 백사장이 10리나 펼쳐진 명사십리 해변

명사십리 해변에서 사색 중인 남성
소안도나 신지도, 완도의 항일운동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훈장이 아니라 족쇄였다. 서러운 세월을 살아온 신지도 독립운동가들이 복권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참으로 안타깝고 서러운 세월이었다. 1994년에 대곡리에 신지항일운동기념탑이, 2010년에는 신지항일운동기념공원이 조성됐다. 이제야 비로소 역사가 바로잡혀 가고 있다. 하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다.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은 여전히 외롭고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지도의 최고 풍경은 명사십리 해변이다. 고운 백사장이 10리(3.8㎞)나 펼쳐져 있다. 명사십리 해변에 서면 인근의 청산도, 대모도, 소모도 등의 섬이 그림처럼 가깝게 다가온다. 명사십리란 이름의 해변들이 그렇듯이 신지도 명사십리 또한 밤이면 모래 우는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린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백사장 주변으로는 소나무 숲이 있고 펜션, 카페, 식당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꼭 여름이 아니라도 좋다. 고즈넉하고 한가로운 늦가을이나 겨울 해변이 그립다면 명사십리 해변에 숙소를 잡고 종일토록 바다만 보고 백사장만 걷다 와도 좋다. 명사십리 백사장에서의 모래찜질은 관절염과 신경통에도 효과가 큰 것으로 유명하다.

섬의 동쪽 동고 해수욕장도 아름답다. 수백 년 전에 주민들이 모래바람을 막아줄 방풍, 방사림으로 심은 해송 300여 그루가 도열해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또 하나 신지도에 가야 할 이유는 길 때문이다. 신지도에도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트레일이 있다. 명사갯길이다. 트레일은 신지대교를 건너면 처음으로 나오는 강독휴게소에서 시작된다. 길은 해안 산자락을 지나 명사십리 해수욕장 끝자락에 있는 울몰까지 10㎞나 이어지는데 가파르지 않아 편안히 걸을 수 있다. 이 길만 걸어도 행복감이 충만해 온다.

신지도는 완도 본섬과 2005년에 다리로 연결돼 배 시간에 쫓길 염려 없이 육로로 접근할 수 있다. 여럿이 함께 가는 여행이라면 값싸고 수산물이 풍성한 완도 수산시장에서 장을 본 뒤 들어가는 것도 여행의 기술이다.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