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아의 '북한 뉴스 대놓고 읽기'] (1) '호칭과 욕설'에 담긴 정세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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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통일부에 출입하며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을 읽기 시작한 게 2017년 4월부터였습니다. 때로는 어이 없고, 때로는 한글인데 무슨 말인지 모르고, 때로는 쓴웃음도 나오는 북한 뉴스의 세계로 초대합니다.“미국의 늙다리미치광이를 반드시, 반드시 불로 다스릴 것이다.”(2017년 9월 21일 김정은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 성명’ 중에서)“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과 도날드 제이.트럼프 미합중국 대통령은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첫 력사적인 수뇌회담을 진행하였다.”(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공동성명 중에서)
북한 뉴스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점을 꼽으라면 단연 미국 관련 표현들이다. 1년 사이에 ‘불로 다스려야 할 늙다리 미치광이’에서 ‘도날드 제이 트럼프 미합중국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미국을 지칭하는 말도 달라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철천지 원쑤’, ‘미 제국주의자(흔히 줄여서 ‘미제’), ‘초거대 반동책동자’등으로 썼지만 지금은 ‘미합중국’, ‘미국’ 등 중립적 단어로 바뀌었다.북한 매체에서 한국과 미국, 중국, 일본 등 주요국에 대해 어떤 수위의 표현을 쓰는지 읽는 건 취재기자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흐름의 변화가 정세를 판단할 때 좋은 힌트가 되기 때문이다.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26일자 6면에 실린 ‘인권 타령에 비낀 미국의 추악한 속내를 해부한다’는 논평을 한 번 보자. 미국 인권단체 ‘휴먼 라이트 워치(HRW)’의 북한 여성인권 보고서와 유엔 대북인권결의안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이다. 이 글에선 우선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에서 흑인 노예 톰을 잔혹하게 괴롭히는 백인 농장주 사이먼 레글리를 현재의 미국에 비유한다. 그러면서 “이런 자가 세상에 대고 그 누구의 ‘인권’을 떠들면서 ‘인권의 옹호자’로 행세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라며 “미국이 떠드는 ‘북조선인권문제’란 아무런 타당성도, 현실적인 근거도 없는 허위이며 궤변”이라고 주장한다.
“있지도 않는 남의 허물을 들추기 전에 더러운 제 코부터 씻어야 한다”며 미국의 빈곤층, 학자금 대출 문제 등을 언급한다. “미국이 손짓하면 ‘지록위마’라는 성구가 그대로 통용되던 어제가 아니며 미국이 누구에게나 함부로 ‘죄인’의 감투를 씌우며 정의를 유린하던 시대는 영원히 지나갔다”고 강조한다.겉으로 보면 미국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인 표현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 정도 수위는 북한 뉴스 기준으론 아주 ‘점잖은’ 것이다. 주어가 ‘미국’이란 중립적 단어다. 욕설도 거의 없다. 북한 매체들은 유엔 대북인권결의안이 통과될 즈음이면 항상 이 테마로 미국과 유엔을 비난한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경우 기자 입장에선 이렇게 생각한다. “북한이 계속 ‘간 보기’를 하는 것 같다. 정말 판을 깨고 싶다면 그냥 들이받았을 텐데. 그럴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밀당 좀 그만 하지.”
북한 뉴스가 동원하는 욕설의 수준을 보기 위해선 북한 매체들이 흔히 ‘남조선 보수패당’이라 지칭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 현 야당인 자유한국당 관련 논평을 읽으면 된다. “북한 욕의 팔 할은 뉴스에서 배웠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우선 이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은 ‘리명박 역도’와 ‘박근혜 역도’로 명칭이 통일돼 있다. 역도(逆徒)는 ‘역적의 무리’란 뜻이다. 북한의 대표적 대남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에선 25일 ‘초보적인 사리분별력마저 마비된 정신병 증상’이란 제목으로 자유한국당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논평을 냈다. 이 논평에선 자유한국당을 이렇게 묘사한다. “입에서 뱀이 나가는지 구렁이가 나가는지조차 모르고 씨벌대는 정신병자들의 광대놀음에 역겨움을 금할 수 없다.”최근 북한과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일본에 대해선 더욱 매몰차게 ‘전투적 단어’들을 퍼붓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내각을 ‘아베 패당’이라 부른다. 노동신문에선 지난 9월 27일 ‘평화를 위협하는 사무라이 후예들의 광기’란 논평에서 “최근 일본 당국자들은 연일 우리와의 대화에 대해 운운하며 ‘새로운 시대’니, ‘평화와 번영의 주춧돌’이니 하고 광고하고 있다”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보다시피 우리를 걸고 들며 조선반도와 지역의 긴장상태를 격화시키고 재침 야욕을 실현하려고 피눈이 되어 날뛰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 뉴스에선 단어 하나 하나가 행간이다. 욕의 수위와 호칭 변화야말로 대표적 행간이다. 처음 볼 땐 눈이 지치고 피곤하며, 정신적 충격을 느낄 수도 있다. 문제는 처음 느낌이 그대로 간다는 것이다. 그래도 읽어야 한다. 일이니까.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북한 뉴스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점을 꼽으라면 단연 미국 관련 표현들이다. 1년 사이에 ‘불로 다스려야 할 늙다리 미치광이’에서 ‘도날드 제이 트럼프 미합중국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미국을 지칭하는 말도 달라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철천지 원쑤’, ‘미 제국주의자(흔히 줄여서 ‘미제’), ‘초거대 반동책동자’등으로 썼지만 지금은 ‘미합중국’, ‘미국’ 등 중립적 단어로 바뀌었다.북한 매체에서 한국과 미국, 중국, 일본 등 주요국에 대해 어떤 수위의 표현을 쓰는지 읽는 건 취재기자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흐름의 변화가 정세를 판단할 때 좋은 힌트가 되기 때문이다.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26일자 6면에 실린 ‘인권 타령에 비낀 미국의 추악한 속내를 해부한다’는 논평을 한 번 보자. 미국 인권단체 ‘휴먼 라이트 워치(HRW)’의 북한 여성인권 보고서와 유엔 대북인권결의안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이다. 이 글에선 우선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에서 흑인 노예 톰을 잔혹하게 괴롭히는 백인 농장주 사이먼 레글리를 현재의 미국에 비유한다. 그러면서 “이런 자가 세상에 대고 그 누구의 ‘인권’을 떠들면서 ‘인권의 옹호자’로 행세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라며 “미국이 떠드는 ‘북조선인권문제’란 아무런 타당성도, 현실적인 근거도 없는 허위이며 궤변”이라고 주장한다.
“있지도 않는 남의 허물을 들추기 전에 더러운 제 코부터 씻어야 한다”며 미국의 빈곤층, 학자금 대출 문제 등을 언급한다. “미국이 손짓하면 ‘지록위마’라는 성구가 그대로 통용되던 어제가 아니며 미국이 누구에게나 함부로 ‘죄인’의 감투를 씌우며 정의를 유린하던 시대는 영원히 지나갔다”고 강조한다.겉으로 보면 미국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인 표현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 정도 수위는 북한 뉴스 기준으론 아주 ‘점잖은’ 것이다. 주어가 ‘미국’이란 중립적 단어다. 욕설도 거의 없다. 북한 매체들은 유엔 대북인권결의안이 통과될 즈음이면 항상 이 테마로 미국과 유엔을 비난한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경우 기자 입장에선 이렇게 생각한다. “북한이 계속 ‘간 보기’를 하는 것 같다. 정말 판을 깨고 싶다면 그냥 들이받았을 텐데. 그럴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밀당 좀 그만 하지.”
북한 뉴스가 동원하는 욕설의 수준을 보기 위해선 북한 매체들이 흔히 ‘남조선 보수패당’이라 지칭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 현 야당인 자유한국당 관련 논평을 읽으면 된다. “북한 욕의 팔 할은 뉴스에서 배웠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우선 이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은 ‘리명박 역도’와 ‘박근혜 역도’로 명칭이 통일돼 있다. 역도(逆徒)는 ‘역적의 무리’란 뜻이다. 북한의 대표적 대남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에선 25일 ‘초보적인 사리분별력마저 마비된 정신병 증상’이란 제목으로 자유한국당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논평을 냈다. 이 논평에선 자유한국당을 이렇게 묘사한다. “입에서 뱀이 나가는지 구렁이가 나가는지조차 모르고 씨벌대는 정신병자들의 광대놀음에 역겨움을 금할 수 없다.”최근 북한과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일본에 대해선 더욱 매몰차게 ‘전투적 단어’들을 퍼붓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내각을 ‘아베 패당’이라 부른다. 노동신문에선 지난 9월 27일 ‘평화를 위협하는 사무라이 후예들의 광기’란 논평에서 “최근 일본 당국자들은 연일 우리와의 대화에 대해 운운하며 ‘새로운 시대’니, ‘평화와 번영의 주춧돌’이니 하고 광고하고 있다”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보다시피 우리를 걸고 들며 조선반도와 지역의 긴장상태를 격화시키고 재침 야욕을 실현하려고 피눈이 되어 날뛰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 뉴스에선 단어 하나 하나가 행간이다. 욕의 수위와 호칭 변화야말로 대표적 행간이다. 처음 볼 땐 눈이 지치고 피곤하며, 정신적 충격을 느낄 수도 있다. 문제는 처음 느낌이 그대로 간다는 것이다. 그래도 읽어야 한다. 일이니까.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