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총수에서 예비창업자로"…도전장 던진 코오롱 이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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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터틀넥 입고 전격 사퇴 선언…'퇴임사' 읽다 눈물 비치기도
부친 이어 1996년 회장직 승계…"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강조코오롱그룹을 23년간 이끌어온 이웅열(63) 회장의 퇴임 선언은 매주 수요일 열리는 임직원 행사인 '성공퍼즐세션'에서 예고 없이 나왔다."새해 밑그림을 그리고 있을 여러분에게 저의 한가지 결심을 알리려 한다"고 운을 뗀 이 회장은 "2019년 1월 1일 자로 회장직에서 물러날 것"이라면서 "회사에서 '회장님'으로 불리는 건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몸담았던 코오롱을 떠나지만 지금은 제게 새로운 시작"이라며 "지금이 아니면 새로운 도전의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아 떠난다"고 거듭 '도전 의지'를 밝혔다.
"까짓거 마음대로 안 되면 어떤가, 이제 망할 권리까지 생겼다"면서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만 20년 이상을 함께 생활한 임직원들을 보며 아쉬운 듯 잠시 눈물도 보였다고 그룹 관계자는 전했다.'자유인'을 상징하듯 청바지에 터틀넥 스웨터 차림을 한 이 부회장의 전격적인 사퇴 선언에 임직원들의 탄성이 이어졌고 일부 직원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코오롱그룹 창업주 이원만 회장의 아들 이동찬 명예회장의 1남 5녀 중 외아들로 태어난 이 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경영 승계를 준비했다.
당시 재벌 후계자로는 드물게 최전방에서 3년간 군 복무를 한 이 회장은 1977년 ㈜코오롱에 입사한 뒤 12년만인 1985년 임원으로 승진했다.이후 1991년 부회장에 이어 1996년 회장에 취임하면서 3세 경영을 시작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사단법인 한국메세나협회 부회장 등도 지냈다.
지난해에는 20여 년간 문화예술 진흥에 기여한 공로로 메세나대상 '메세나인상'을 받기도 했다.노사 합의로 만들어 낸 '항구적 무분규 선언' 등을 통해 노사 상생의 기업문화를 정착시켰고, 대졸 신입사원의 '30% 여성 채용' 방침을 통해 양성평등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국내 바이오산업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1999년에 미국에 '티슈진'을 설립해 세계 최초의 골관절염 세포유전자치료제 '인보사' 개발에 나선 것도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 회장은 1990년대 후반 '40대 젊은 총수'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이후 2004년 코오롱캐피탈 횡령 사건, 2014년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사고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는 회장으로 일하면서도 임직원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끊임없이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한 임원은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씀을 수없이 했다"면서 "그룹 총수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본인이 몸소 변화와 도전을 실천한 것"이라고 말했다./연합뉴스
부친 이어 1996년 회장직 승계…"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강조코오롱그룹을 23년간 이끌어온 이웅열(63) 회장의 퇴임 선언은 매주 수요일 열리는 임직원 행사인 '성공퍼즐세션'에서 예고 없이 나왔다."새해 밑그림을 그리고 있을 여러분에게 저의 한가지 결심을 알리려 한다"고 운을 뗀 이 회장은 "2019년 1월 1일 자로 회장직에서 물러날 것"이라면서 "회사에서 '회장님'으로 불리는 건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몸담았던 코오롱을 떠나지만 지금은 제게 새로운 시작"이라며 "지금이 아니면 새로운 도전의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아 떠난다"고 거듭 '도전 의지'를 밝혔다.
"까짓거 마음대로 안 되면 어떤가, 이제 망할 권리까지 생겼다"면서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만 20년 이상을 함께 생활한 임직원들을 보며 아쉬운 듯 잠시 눈물도 보였다고 그룹 관계자는 전했다.'자유인'을 상징하듯 청바지에 터틀넥 스웨터 차림을 한 이 부회장의 전격적인 사퇴 선언에 임직원들의 탄성이 이어졌고 일부 직원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코오롱그룹 창업주 이원만 회장의 아들 이동찬 명예회장의 1남 5녀 중 외아들로 태어난 이 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경영 승계를 준비했다.
당시 재벌 후계자로는 드물게 최전방에서 3년간 군 복무를 한 이 회장은 1977년 ㈜코오롱에 입사한 뒤 12년만인 1985년 임원으로 승진했다.이후 1991년 부회장에 이어 1996년 회장에 취임하면서 3세 경영을 시작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사단법인 한국메세나협회 부회장 등도 지냈다.
지난해에는 20여 년간 문화예술 진흥에 기여한 공로로 메세나대상 '메세나인상'을 받기도 했다.노사 합의로 만들어 낸 '항구적 무분규 선언' 등을 통해 노사 상생의 기업문화를 정착시켰고, 대졸 신입사원의 '30% 여성 채용' 방침을 통해 양성평등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국내 바이오산업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1999년에 미국에 '티슈진'을 설립해 세계 최초의 골관절염 세포유전자치료제 '인보사' 개발에 나선 것도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 회장은 1990년대 후반 '40대 젊은 총수'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이후 2004년 코오롱캐피탈 횡령 사건, 2014년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사고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는 회장으로 일하면서도 임직원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끊임없이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한 임원은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씀을 수없이 했다"면서 "그룹 총수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본인이 몸소 변화와 도전을 실천한 것"이라고 말했다./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