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페로니즘 70년 현장도 살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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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포퓰리즘 헤어나지 못한 아르헨1947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세력의 대령 출신인 후안 페론이 노동계층을 등에 업고 대통령에 선출됐다. 그는 두 가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사회 정의’와 ‘경제 독립’이다. 하지만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그는 경제자문단에 네 가지 지침을 주면서 5개년 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첫째, 근로자의 급여를 대폭 올린다. 둘째, 완전고용을 이룬다. 셋째, 40% 넘는 성장률을 달성한다. 넷째, 철도 에너지 전화 등 사회간접자본을 대폭 개선한다.
'퍼주기 정책' 재정적자에 13번째 IMF行
'소득주도 성장' 재점검하는 계기가 되길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페론의 생각은 이랬다. 근로자의 임금부터 한껏 올려주자. 노동법을 손질하면 된다. 근로자의 임금이 늘어나면 소비가 늘 테고, 소비가 내수를 자극해 결국 산업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겠나. 요즘 우리 용어로 말하면 ‘소득주도 성장’이었던 셈이다.최저임금법이 강화되고 근로시간이 줄었다. 정년 연장과 함께 퇴직금 제도가 만들어졌고 유급 휴가도 시행됐다. 매년 20%가 넘는 임금 인상이 단행됐다. 1947년의 임금 인상률은 무려 47%였다. 친노조 정책 일색이었다. 노조원이 5년 만에 4배로 불었다. 당시 분위기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정책에는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가파른 임금 상승이 인플레이션을 촉발시켰다. 실질 임금이 뒷걸음질쳤다. ‘퍼주기’에 익숙해진 근로자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파업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하면서 자본재 수입이 늘어 외채가 급증했다. 페론은 결국 경제 독립을 포기하고 적극적인 외자유치 전략으로 급선회했다. 그 전략이 그렇지 않아도 불만이던 근로자들을 자극했다. 외자가 밀려들어오면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해서다. 비행기가 대통령궁을 폭격하기까지 했을 정도다. 페론의 1기 집권은 그렇게 끝났다.
70년 묵은 얘기를 뭘 하러 꺼내 드느냐는 분들도 있겠다. 하지만 지난 일이 아니다. 현재진행형이기에 하는 얘기다. 경제난이 장기화되자 페론은 국민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귀국해 다시 대통령에 오른다. 그게 1973년이다. 그러니 그 뒤로 바뀐 것이 있겠는가.정치인들은 국민에게 ‘페로니즘’이라는 마약을 주사했을 뿐 개혁은 없었다. 시도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포퓰리즘에 취한 국민이 개혁을 거부한 탓이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인플레율이 수천%를 넘어도 국민들은 요지부동이다. 1960년대까지 6대 강대국이던 선진국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아르헨티나 패러독스’는 학술용어가 됐다.
2003년부터 12년간 대통령을 이어 맡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부부는 경제를 더욱 수렁에 몰아넣었다. 실업 문제를 풀겠다고 공공 일자리를 늘리더니 공무원 수가 70%나 늘었다. 일자리 4개 가운데 1개가 공무원 몫이다. 공무원 연금 수급자는 두 배가 됐다. 그래도 불만이다. 끊이지 않는 시위의 절반 이상이 공무원들이다. 민간 일자리는 줄었다. 실업이 해결될 리 없다.
전기 가스 등 에너지 가격은 서민을 위해서라며 동결된 지 오래다. ‘공짜 시리즈’가 난무해 모든 대학생에게 노트북이 무상으로 지급됐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정부 지출은 2004년 17.4%에서 2015년 37.8%로 두 배 넘게 불었다. 재정적자를 메우려고 중앙은행은 마구잡이로 돈을 찍어냈다. 성장률은 마이너스다. 그러자 통계까지 조작한 정부다.기업인 출신 마우리시오 마크리 현 대통령은 화폐 남발 대신 외채를 끌어댔지만 빚을 갚지 못해 국가부도 위기에 몰리자 얼마 전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렸다. 아르헨티나 역사상 13번째 구제금융 신청이다.
페론이 사망한 지 45년이다. 그러나 그의 망령은 여전히 부에노스아이레스 하늘을 맴돌고 있다. 정치인도, 국민도, 모두가 한 번 빠진 포퓰리즘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오늘 아르헨티나를 방문한다. G20 정상회의와 대북 문제를 논의할 한·미 정상회담도 중요하지만 마크리 대통령과의 회담도 못지않다. 얼마 전 경제위기와 관련한 대국민 담화에서 포퓰리즘을 비판하면서 “우리는 분수 넘치게 살았다”고 한탄한 그다. 그의 입을 통해 페로니즘 70년의 폐해를 들어보라. 이번 출장은 더욱 성공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