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경제 고집한 19세기 조선…쌀 생산 줄고, 무역 끊겨 場市 '직격탄'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29) 위기가 찾아오다

한계 직면한 경제성장
인구 늘고 총생산 증가했지만 1인당 실질소득 증가는 불확실
무분별한 개간에 산림 황폐화

무역 불균형 '자충수'
對日교역 감소로 銀 유입 급감…中비단 무분별 수입, 견직업 타격
일본銀 대체한 홍삼만 수출 늘어…충청·전라·경상 장시 100여개↓
폐쇄경제의 운명

18세기 조선의 경제는 성장 추세였다. 인구가 늘고 농지가 개간돼 총생산이 증가했다. 장시의 수도 늘었다. 1인당 생산성과 실질소득이 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어쨌든 18세기의 성장은 조만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폐쇄경제였기 때문이다. 일본 및 중국과의 무역이 연간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에 불과했다.폐쇄경제의 성장은 어느 단계에서 생태 균형을 파괴하며, 이는 위기를 몰고온다. 인류사의 크고 작은 모든 문명에서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였다. 성공은 자연 생태를 파괴하거나 인간의 행태를 경직시킴으로써 위기를 초래했다. 위기 조짐을 읽고 대응에 성공한 문명은 살아남아 번성했다. 그렇지 못한 문명은 소멸했다. 19세기 조선은 그 같은 인류 문명사의 엄중한 시험에 봉착했다.

2002년 나는 경상도 경주 옥산서원이 소장하고 있는 18~19세기 서책을 조사할 기회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폐쇄경제의 운명을 절감했다. 1개 연도에 1책씩 작성된 서원의 지출부를 연도순으로 배열하니 그것만으로도 경제변동의 장기추세가 훌륭하게 관찰됐다. 장부의 지질(紙質)은 점점 조악해졌다. 책을 맨 실의 재료가 비단에서 종이로 열악해졌다. 사람들의 교양 수준도 그랬는지 글씨가 선비의 달필에서 동몽(童蒙)의 졸필로 저하됐다.
1900년대 서울 근교에서 키질하는 농부들. 멀리 보이는 산지가 심하게 헐벗어 있다.
호랑이의 철수18세기 초부터 한반도의 산림은 헐벗기 시작했다. 산림이 황폐하면 그 속에서 놀던 각종 짐승이 소멸한다. 그 초기에는 짐승과 인간의 충돌이 잦아지는데, 그로부터 산림이 황폐하는 조짐을 찾을 수 있다. 17세기 왕조실록에서 호랑이가 마을에 출몰해 사람이나 가축을 해쳤다는 기사는 13건에 불과하다. 18세기 실록에서 관련 기사는 74건이나 된다. 호랑이 피해가 절정에 달한 것은 1750년대다. 1754년 4월 한 달에 경기도에서만 호랑이에게 먹힌 자가 120명이나 됐다. 호랑이 피해는 1770년대를 넘기면서 부쩍 줄어들었으며, 19세기가 되면서 거의 사라졌다. 19세기 실록에서 호랑이에 관한 기사는 고작 4건에 불과하다. 이로부터 한반도의 산림은 1770년대 이후 호랑이가 살 수 없을 정도로 성글게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산림의 황폐

산림이 황폐한 것은 인구 증가에 따라 연료 시목(柴木·땔나무) 수요가 증대했기 때문이다. 식량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산지를 열심히 개간한 것도 큰 요인이었다. 하층민까지 쌀을 주식으로 섭취하는 식생활 풍조도 산지 개간을 촉진했다. 지리산 골짜기에 계단식 논이 조성되는 것은 18세기의 일이다. 개항 후 조선을 찾은 외국인들은 이 나라의 산림이 극도로 황폐해 있음에 대해 적지 않은 기술을 남겼다.
1910년 총독부가 작성한 조선임야 분포도. 초록색은 성림지, 붉은색은 나무가 매우 성긴 치림지, 노란색은 나무가 아예 없는 무입목지.
전국의 임상(林相)에 대한 최초의 조사는 191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뤄졌다. 그 결과 전국 임야의 32%는 성림지(成林地), 42%는 나무가 매우 성긴 치림지(稚林地), 26%는 나무가 아예 없는 무입목지(無立木地)로 판명됐다. 성림지는 인간의 접근이 불가능한 북한의 고원지대, 태백산맥과 같은 깊은 산중의 원시림이었다. 이를 제외한 한반도 거의 전역이, 특히 농업 선진지대인 중남부 이하가 치림지나 무입목지로 헐벗어 있었다. 제시된 지도는 1910년 총독부가 그린 조선임야분포도다. 전국 산지의 대부분이 붉은색의 치림지나 노란색의 무입목지로 칠해져 있다.

공유지의 비극

산림이 황폐하자 조선왕조는 전국 요처에 공산(公山)을 지정하고 벌채를 금지했다. 그렇지만 재목에 대한 민간의 수요가 그대로인 한 금지 일변도 정책만으로는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조선왕조는 산지에 대한 사적 권리를 공인하거나 제도화하지 않았다. 조선의 산림제도는 끝까지 “산림과 천택(川澤)은 백성과 공유한다”는 성리학적 왕정의 이념에 충실했다. 산림을 사유재산으로 관리하는 주체가 부재한 가운데 산림 자원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증가하자 먼저 베는 사람이 임자가 되는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 전형적으로 연출됐다.쌀 생산의 감소

산림의 황폐는 적은 비에도 산지의 흙과 돌을 흘러내리게 해 제언(堤堰)을 메우고 보(洑)를 무너뜨리게 했다. 1918년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300개 제언과 2만700개 보가 존재하지만 그 태반은 이용이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수리의 편리가 있는 논은 총 154만 정보 가운데 23만 정보에 불과했다. 또 산림의 황폐는 잦은 수해를 유발했다. 토사의 퇴적으로 바닥이 높아진 하천은 적은 비에도 범람해 주변 농지를 떠내려 보내거나 모래로 덮는 피해를 안겼다. 조선왕조의 과세지는 1784년의 102만 결(1결=2만㎡)에서 1883년의 94만 결로 약 8% 감소했다.

쌀의 총생산이 감소한 것은 경지가 줄어든 탓도 있지만 토지생산성 하락이 보다 중요한 원인이었다. 남부지방 36개 마을에서 채집된 추수기는 18~19세기 두락(1두락=600㎡)당 평균 생산량과 지대량의 장기 추세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두락당 지대량은 1750년대까지 벼 15~20두(1두=6L)였는데 이후 계속 감소해 1880년대에는 6~7두로까지 낮아져 있었다. 특히 1850년대 이후의 감소 추세가 심각했다.

김홍도의 ‘점심을 먹는 농군들’. 쌀에 탐닉하는 서민의 식생활 풍조를 잘 그렸다.
요컨대 논농사의 생산성은 18세기 중반부터 서서히 하락했으며, 사회·정치적 혼란이 심해진 19세기 중반 이후 급격히 내려앉았다. 물가사 연구도 이 점을 입증하고 있다. 다른 재화 가격에 대비된 쌀의 상대가격은 올라가는 추세였는데, 이는 쌀 공급이 점점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논농사의 생산성이 증가 추세로 반전하는 것은 일본으로 쌀이 대량 수출되기 시작한 1890년부터다.

무역 동향

1750년대 이후 일본은(日本銀)의 유입이 두절됐다. 동래 왜관에서 5일마다 양국 상인이 만나는 무역 시장은 1722~1726년에는 74%의 개시율을 보였으나 1844~1849년에는 24%로 낮아져 있었다. 그 사이 양국 외교도 점점 소원해졌다. 1636년 이후 8회에 달했던 조선왕조의 통신사 파송은 1811년 이후 중단됐다. 일본은의 유입이 감소하자 중국과의 무역에 타격이 가해졌다. 은 부족에 따른 대중(對中) 무역의 침체를 구한 것은 재배 인삼, 곧 가삼(家蔘)이었다. 자연산과 달리 가삼은 장거리 수송에서 부패할 수 있어 홍삼으로 가공됐다. 홍삼의 공인된 수출 물량은 1797년 120근에서 1823년 800근, 1834년 8000근으로 늘었다.

홍삼을 결제수단으로 한 대중 무역이 국내 경제 발전과 시장 확대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의심스럽다. 인삼 재배와 홍삼 가공은 정부 허가를 받은 소수 상인의 특권이었다. 반면 중국산 견직물의 대량 수입은 조선의 견직업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조선왕조는 견직업을 보호하기 위한 산업정책이나 무역정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의 정책을 취했다. 1834년 조선왕조는 비단을 경쟁적으로 수입하려는 상인들의 청원을 허락해 비단 수입권을 널리 개방했다. 1834년 홍삼 수출량이 종전 800근에서 8000근으로 갑자기 증가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로 인해 조선의 전통 견직업은 사실상 소멸했다. 개항 이후 중국과 일본은 서양에 비단이나 생사(生絲)를 수출했는데 조선은 그럴 만한 산업이 없었다.

장시의 위축대일 무역의 쇠퇴와 대중 무역의 불균형은 국내시장의 위축을 초래했다. 1770년 216기나 됐던 전라도의 장시가 1830년까지 188기로 감소했다. 뒤이어 충청도와 경상도의 장시가 감소했다. 1830~1876년 충청·전라·경상 3개 도의 장시는 614기에서 511기로 감소했다. 국내시장이 위축됨에 따라 시장 간 통합도 해체됐다. 전라도와 경상도 간 시장통합 정도를 나타내는 쌀값 변동의 상관계수는 점점 낮아지는 추세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선 어떤 수준의 통합도 거론하기 힘들 정도가 되고 말았다. 쌀을 싣고 포구와 장시를 오가는 상인의 행렬이 자취를 감췄다. 쌀이 부족해졌을 뿐 아니라 곳곳에 도적의 무리가 발호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민란의 시대였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