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 (37)] 소설의 끝맺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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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S13
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대체로 작품의 주제 의식이 압축되어 있으며 이와 관련된 작가의 비전이 제시될 때가 많다. 그것은 직설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여운을 남기는 형태로 서술되어 울림을 주기도 한다. 마지막이 인상적인 작품을 읽어 보자.[“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작품 주제와 작가 문학성이
압축되어 있어 진한 여운을 주죠
현진건 '운수 좋은 날'
박완서 '꿈꾸는 인큐베이터'
성석제 '첫사랑'
마지막 장면을 되새기며
소설의 읽는 재미를 새롭게 느껴보자
설렁탕이 이다지도 안타깝고 유감스럽게 기억될 줄은 김 첨지도 독자들도 몰랐을 것이다. 병든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 사 주지 못하던 인력거꾼 김 첨지는 평소보다 훨씬 많이 돈을 벌게 된 날 결국 아내를 잃는다. 「운수 좋은 날(1924, 현진건)」이라는 제목의 아이러니도, 최고의 행운 뒤에 최악의 불행이 따르는 삶의 상례도 감당하기 힘든 비극이다.[차도로 나왔으나 좌회전을 하지 못해 돌아가야 할 도시를 뒤로 하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에 유턴 지점이 있겠지, 유턴 지점을 열심히 찾는 것도 아니면서 막연히 그렇게 믿으며 상쾌한 속도를 냈다. 도시와 더불어 내 집 또한 뒤로 뒤로 멀어져가는 기분 또한 상쾌했다.]
1993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박완서의 「꿈꾸는 인큐베이터」의 마지막 문장이다. 화자는 왜 집이 ‘뒤로 뒤로’ 멀어져가는 기분이 상쾌하다고 하는가. 화자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며 남편과의 사이가 원만하며 딸 둘과 아들이 있는, 남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 여인이다. 그러나 둘째 딸과 아들 사이에는 딸이 있었고 그 딸은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 화자는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는 이유로 임신 중절 수술을 하였고, 수술을 강요한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원한에 가까운 감정을 품게 된다. 물론 그런 강요를 뿌리치지 못한 자신이 가장 미울 것이다. 1990년대 발달한 의학은 태아의 성별을 감별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으나 우리 사회의 남아 선호 사상은 여전했다. 기술과 의식의 간극의 틈새에서 여아 임신중절이라는 사회 문제가 발생하였다.이제 이런 현상은 사라졌지만 이 작품은 두고두고 부끄러워해야 할 한 시절의 야만을 기록하고 있다. 화자의 죄책감은 시간이 흘러도 옅어지지 않았다. 집을 뒤로 하고 달리는 화자, 유턴 지점을 찾지 않는 화자가 이전과는 다른 주체적 삶을 개척하기를 기원한다.
[“한번 안아보자.” / “그래.” / 나는 처음으로 너의 부탁을 받아주었다. 너는 나를 안았다가 안았던 팔을 풀고 외투 단추를 급하게 풀면서 말했다. / “너, 다시는 안 오겠구나.” / “그래.” / 너는 외투를 벌렸다. 나는 네 품 안에 들어갔다. / “사랑한다.” / 너는 나를 깊이 안았다. / “나도.” / 지나가던 아이들이 우리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지옥의 빵공장에서 빵 트럭이 쏟아져 나오고 딴 세상 바다에선 고래들이 펄쩍 뛰어오르던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사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성석제의 「첫사랑(1995)」의 마지막 부분이다. 공단 배후지 변두리 동네로 전학 온 ‘나’가 학교 제일의 깡패에게 흠씬 얻어맞은 직후 너는 ‘나’에게 다가온다. 너는 그 깡패조차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힘 있는 친구다. ‘나’는 신체검사 때 너의 몸을 뒤덮은 털을 본다. 전교에 그런 털을 가진 아이는 없었다. 말하자면 너는 동급생 중 성인 남자에 가장 가깝다. 그것이 너가 가진 힘의 근원이었다. 그런 너가 ‘나’의 주위를 맴돈다. 깡패로부터 보호해 주고 보름달 빵을 사 주고 목욕탕에서 여탕을 훔쳐보도록 도와주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물론 ‘나’는 너를 거절하고 거절하고 또 거절한다. 지옥 같은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죽어라 공부하고 오로지 공부한다. 마침내 ‘나’가 지옥 밖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위한 시험에 합격한 날 너는 ‘나’를 찾아온다.
마지막 문장은 그날 둘의 포옹을 그리고 있다. ‘나’는 왜 너의 포옹을 허락했을까? 사랑한다는 너의 말에 왜 “나도”라고 대답했을까? 합격의 기쁨에 잠시 관대해진 것일까 아니면 ‘나’ 역시 너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일까. 소년과 소년은 이제 사랑을 시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성장의 한 시기 비밀스러운 통과의례를 지나는 중일 뿐일까. 비로소 사내가 되었다는 ‘나’의 깨달음은 이 의례를 통과하여 성인의 세계로 진입할 것이라는 예감일까? 어떻게 읽든 소년기의 사랑은, 성장은, 외투 단추를 급하게 푸는 너의 안달은 싱그럽고 또 아리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