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선의 'ASEAN 톺아보기' (11)] 태국의 꿈 '아세안의 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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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 <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 前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 >‘지속 가능성을 위한 파트너십 증진(Advancing Partnership for Sustainability).’ 2019년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의장국 태국이 천명한 슬로건이다. 아세안은 10개 회원국이 영문 국가명의 알파벳 순서로 매년 번갈아가며 의장국을 맡는다. 미국과 중국 갈등을 비롯한 여러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아세안이 획기적인 무언가를 추구하기보다는 내부 결속을 다지고 대내외 파트너와의 협력을 통해 내실을 기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아세안은 베트남전이 본격화해 공산주의 확산이 우려되던 1967년 8월8일, 태국 수도 방콕에서 창설됐다. 결성부터 이후 50여 년의 발전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온 태국으로서는 내년 아세안 의장직 수임에 대한 기대가 자못 크다.그런데 10년 전의 악몽이 떨쳐지지 않는다. 2009년 4월 태국 휴양도시 파타야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 회의장에 당시 축출된 탁신 전 총리의 지지자들인 붉은 셔츠 시위대가 난입했다. 당연히 회의는 무산됐다. 급기야 비상사태가 선포됐고 당시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정상이 헬기로 피신, 귀국해야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의 태국 정국도 녹록지 않다. 현 쁘라윳 짠오차 총리는 2014년 태국 역사상 19번째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육군사령관 출신이다. 신헌법에 따라 내년 2월까지는 수차례 미뤄온 총선을 치러야 한다. 총선을 순조롭게 치르고 상반기 아세안 정상회의를 잘 개최해야만 정국 안정을 기하고 국제적 위상도 높일 수 있다.4차 산업혁명의 아세안 관문 모색
우선 태국은 가장 역동적인 지역협력체로 주목받고 있는 아세안에서 지도적 역할을 회복하길 원하고 있다. 한국의 신남방정책과 같이 중국, 일본은 물론 호주, 인도도 아세안 중시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말처럼 이렇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때 의장국 태국의 노력과 성과가 돋보일 수 있다.
의장국 태국에는 극복해야 할 많은 난제가 있다. 무엇보다 미·중 패권경쟁 구도에서 어떻게 아세안의 중심성과 단합을 유지할 것인지, 남중국해 행동규칙(Code of Conduct) 및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교섭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지가 어려운 과제다.또 태국은 아세안 및 인도·중국과 연결되는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해 아세안의 허브로 성장하려는 장기적인 야심을 갖고 있다. ‘타일랜드 4.0’ 정책과 ‘20년 국가전략’(2017~2036년)이 기본 골격이다. 스마트 인프라 강화 및 최첨단 정보통신기술(ICT)산업 육성을 통해 중진국 함정을 탈피하고, 특히 동부경제특구를 4차 산업혁명 전진기지로 변모시켜 아세안의 관문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태국에 거대한 제조업 기반을 구축한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도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 아래 적극적으로 태국과의 협력을 모색하고 있다. 이 와중에 경쟁관계인 일본과 중국이 태국의 인프라 사업에서 협력을 추진한다니 신경이 쓰인다.
태국 정부는 높은 수준의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과 경험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과의 협력을 원하고 있다. 한국은 다른 강대국과 달리 역사적으로 얽힌 문제가 없고 지역 패권 의도가 없어 진정한 파트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제조업 분야에서 전략적인 산업협력 모델을 구축하고, ICT, 사물인터넷(IoT), 전기자동차, 로봇·자동화, 스마트농업, 스마트시티 및 스마트공항 프로젝트 등 경쟁력 있는 분야에서 협력 기회를 창출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최근 일·중 협력에서 보듯 제3국과의 공동 진출도 적극 모색해야 한다.
'사람 중심 파트너십' 최적 파트너올해 한국과 태국은 수교 60주년을 맞았다. 태국은 6·25전쟁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육·해·공군 병력을 파견했다. 연인원 1만5000여 명이 참전해 수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바친 우리의 혈맹이다. 오늘날 양국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활발한 협력과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180만 명이나 되는 한국인이 태국을 방문했다. 더 놀라운 것은 태국의 50여 개 대학에 한국어, 한국학 과정이 개설돼 있고, 112개 중·고교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이 3만3000명이나 된다는 점이다. 그들의 우리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실로 대단하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사람 중심의 파트너십이 신남방정책의 기본철학이므로, 한국과 태국은 딱 맞아떨어지는 파트너인 셈이다.
또 북핵 문제가 진전될 경우 태국의 긍정적인 기여를 기대할 수 있다. 북한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가입한 것은 태국이 아세안 의장국이던 2000년 7월 방콕에서다. 그해 6월 김대중·김정일 남북한 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한반도 정세가 호전되면서 태국의 역할이 빛을 발했다. 아세안의 여러 협의 채널을 통해 국제사회가 북한을 포용하도록 하는 창의적인 역할을 앞으로 태국이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세안 통합의 모멘텀을 살리면서 아세안의 허브로 부상하고자 하는 태국의 꿈(夢). 그 여정에 한국이 진정한 친구로서 같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