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죽을 것" 예언자의 말에 자신의 명령을 폐기하는 크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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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인간의 짧은 삶의 경로를 결정하는 ‘운명(運命)’이란 존재하는가? 인간은 그 운명을 실행하는 노예에 불과한가? 고대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는 신들의 계보를 기록한 《신통기》(기원전 700년께)에서 운명의 신 ‘티케(Tyche)’를 소개한다.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의 딸인 티케는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키를 가지고 지상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이다. 티케는 방향타를 쥐고 있지만, 혼돈을 상징하는 바다와 심연 앞에서는 무력하다.운명티케는 로마시대에 들어와 운명의 여신인 ‘포르투나(Fortuna)’로 대치됐다. 행운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포천(fortune)’이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포르투나는 부를 선물하는 행운을 상징한다. 그는 세상을 공평하게 만들기 위해 물레를 돌린다. 부를 공평하게 배분하기 위해서다. 스토아 철학자 키케로는 이런 라틴어 문장을 남겼다. ‘포르투나 에스트 카이카(Fortuna est caeca).’ 이 문장을 번역하면 ‘운명(의 여신)은 장님이다’다. 행운의 맹목성과 변덕스러움을 꿰뚫은 명언이다.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운명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힘에 달려 있고, 그 힘이 당시 성행한 점을 통해 《안티고네》 이야기에 급반전을 시도한다.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30) 운명(運命)
요동치는 운명
맹목적이고 변덕스러운 운명…비극 '안티고네'에 반전 시도
예언가 테이레시아스
"크레온王의 불의한 칙령은 신들에 대한 반항이자 횡포
집안에 불행이 시작될 것"
예언가에 설득되는 크레온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하고 석굴 속 안티고네를 풀어줘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
안티고네는 차디찬 석굴에 감금됐다. 그곳에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안티고네는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친구 하나 없이 사라질 것이다. 테베 원로원 의원들은 안티고네의 비참한 처지를 한탄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운명이라고 말한다. 운명이 안티고네를 저주받은 오이디푸스의 딸이자 동생으로 태어나게 했다.크레온이 자신의 권력으로 안티고네를 지하에 감금하면서 이 비극적인 사건은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느닷없이 무대 위로 장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등장한다. 테이레시아스는 테베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라는 점을 알린다. 신들은 테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자연의 이치와 섭리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그리스신화에 의하면 테이레시아스는 테베의 아폴로 신전에서 점을 치는 예언자다. 신의 의중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매개자로, 목동 에베레스와 요정 카리클로 사이에서 태어났다. 테이레시아스는 특히 고대 그리스의 태고 도시 테베의 건설과 관련된 비극작품에 종종 등장한다.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선왕 라이우스의 살인자를 찾는 데 도움을 준다.
테이레시아스는 《안티고네》에 다시 등장한다. 한 소년의 손에 이끌려 무대로 나온다. 예언자의 등장은 예사롭지 않다. 크레온이나 테베 원로원 의원들이 알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이 그의 입을 통해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크레온은 당황하며 테이레시아스에게 말을 건넨다. “무슨 일입니까? 늙으신 테이레시아스여! 놀랄 만한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습니까?”(991행)크레온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던 안티고네나 하이몬과는 위상이 다른 테이레시아스와 마주친다. 크레온은 테베의 정사를 결정하지만, 테이레시아스는 테베의 미래 운명을 예언하고 결정하기 때문이다. 테이레시아스는 크레온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내가 당신을 가르칠 것이다. 당신은 이 예언자에게 설득당할 것이다.”(992행)
크레온이 테베라는 배를 침몰시키지 않고 항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언자의 말을 경청하고 따랐기 때문이다. 테이레시아스의 등장으로 테베의 최고 권력자로서의 권위가 손상되기 시작한다.
점(占)예언자는 크레온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당신의 운명이 칼날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크레온은 예언자의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테이레시아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아보기 위해 사용했던 ‘점(占)’을 통해 크레온의 운명을 알려준다.
예언자는 새의 움직임과 소리를 통해 점을 친다. “나는 점을 보는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모든 새가 나를 보고 모이는 장소다.”(999~1000행) 고대 로마 역사가는 테이레시아스가 새의 움직임을 보고 점을 치는 관습을 창시했다고 말한다. 이 점은 고대 그리스어로 ‘오르니소스코포스(ornithoskopos)’라고 부른다. ‘오르니(ornis)’는 ‘새’라는 뜻이고 ‘스코포스(skopos)’는 ‘관찰하다, 해석하다’란 의미를 지닌 고대 그리스 동사 ‘스코페인(skopein)’에서 온 말이다.
오르니소스코포스는 새의 활동, 특히 새의 비행과 울음소리를 관찰하고 신의 뜻을 알려는 태고의 관습이다. 영어 단어로 ‘상서로운’을 의미하는 ‘어스피셔스(auspicious)’도 ‘새’를 의미하는 ‘어(au·awi)’와 ‘관찰하다’를 의미하는 ‘스펙(spec)’의 합성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특히 까마귀를 관찰했다. 까마귀는 테베의 신이자 신탁의 신인 아폴로와 깊이 연결돼 있다. 아폴로의 연인 중 한 명인 코로니스(Coronis)는 의술의 신이 될 아스클레피오스를 임신한 상태였다. 코로니스는 아폴로 몰래 아르카디아 왕 엘라토스의 아들 이스키스와 사랑에 빠졌다. 아폴로는 아내의 불륜을 감지하고 흰색 갈까마귀에게 이스키스의 눈을 쪼아 장님이 되도록 명령했다. 아폴로는 흰색 갈까마귀가 자신의 명령을 실행하지 않은 사실을 알고, 날개를 태워 시커멓게 만들었다. 이렇게 흰색이 검은색이 됐다. 고대 그리스어로 까마귀는 아폴로 아내의 이름인 코로니스다.
테이레시아스는 새들이 정상적인 소리를 내지 않고 괴로워서 울부짖는 비명을 듣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다. 그는 그 소리를 ‘바르바로이(barbaroi)’라고 명명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야만인들을 ‘바르바로이’라고 불렀다. 야만인을 뜻하는 영어 단어 ‘바바리언(barbarian)’이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이 소리는 신과 인간의 소통이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불길하고 위험하다는 표식이다. 새들이 서로 발톱으로 찢어 죽였다. 테이레시아스는 깜짝 놀라 이번에는 제물로 놓인 동물을 연소시켜 점을 쳤다. 하지만 제물에서 나온 육즙이 재에 떨어져 연기를 내고 쓸개는 부풀어 터져버렸다.
테이레시아스는 점을 통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점에 사용된 새와 동물(개)이 폴리네이케스의 불길한 사체를 뜯어 먹었기 때문이다. 크레온이 자만심과 욕심으로 강요한 불의한 칙령이 인간뿐만 아니라 새와 개를 포함한 자연계의 교란을 가져왔다. 신과 인간의 소통도 단절시켰다. 테이레시아스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고 안티고네를 풀어주라고 조언한다. 크레온은 예언자의 말을 의심한다. 테이레시아스가 다른 사람들처럼 돈을 좋아해 누군가의 뇌물을 받고서 자신을 협박한다고 생각한다.
예언
예언자는 크레온이 자신이 내린 결정을 체면 때문에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예언한다. “지금부터 잘 들어두십시오! 태양의 재빠른 수레가 몇 번 하늘을 돌기 전에, 당신의 혈육이 다른 시신들에 대한 보복으로 시신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상에 속한 자(안티고네)를 하계로 밀어내고, 살아있는 자를 무자비하게 무덤 속에서 살게 하며, 하계의 신들에게 속하는 자(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장례를 치르지 않고 매장도 않은 채 욕보여 지상에서 더럽혔습니다.”(1064~1071행)
예언자는 크레온의 행위가 하계 신들에 대한 반항이자 횡포라고 말하며 크레온 집안에 불행이 시작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러고는 자신을 데려왔던 소년에게 말한다. “아이야, 나를 집으로 인도해다오. 그러면 저분은 젊은 사람들에게 화를 낼 것이다. 그런 후 그는 더 입조심하고 지금보다는 착한 마음씨를 가지게 될 것이다.”(1087~1090행)
테이레시아스가 무대에서 떠난 후, 크레온과 원로원 의원들은 혼돈에 빠진다. 이제야 크레온은 예언자의 말에 굴복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라고 판단한다. 원로원 의원들은 다소 누그러진 크레온의 태도를 보고 말한다. “가셔서 소녀를 석실에서 풀어주시고 누워 있는 자에게 무덤을 만들어 주십시오!”(1100~1101행) 크레온은 아들이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명령을 폐기한다. 그의 신하들은 언덕으로 올라가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하고, 크레온은 석굴로 내려가 ‘손수’ 안티고네를 풀어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법
크레온의 마음은 아직도 신들의 뜻이라고 하는 관습을 의심한다. 인간이 만든 도시 테베를 치리하기 위해 자신이 정한 법 외에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한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신들이 정한 법을 지키는 것이 최선인지 의심이 드는구나!”(1113~1114행) 신들이 정한 법은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모든 인간이 준수해야 할 도덕이며 윤리다. 운명의 여신은 크레온을 어떻게 처리할까? 크레온의 아들과 아내 에우리디케에게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