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동영상 전쟁에 뒤처진 제도 정비

김희경 문화부 기자 hkkim@hankyung.com
“규칙이 생기기 전에 영화가 먼저 도착했다. 업계 규칙을 정비하는 신호탄이 되길 바란다.”

봉준호 감독이 지난해 6월 자신이 만든 넷플릭스 영화 ‘옥자’를 공개하며 한 말이다. ‘옥자’는 미국 온라인동영상스트리밍(OTT) 플랫폼 업체인 넷플릭스가 한국에서 자체 제작한 작품으로 당시 적잖은 논란을 일으켰다. 국내 극장 개봉일에 넷플릭스에서도 동시에 작품을 공개했기 때문. 개봉 후 3주 정도 지나 인터넷TV(IPTV) 등 다른 플랫폼에서 공개하는 기존 관행과 달랐다. CJ CGV 등 국내 멀티플렉스 3사는 이에 반발하며 상영을 거부했다. 결국 몇몇 소수 지역 극장에서만 개봉됐다.1년6개월이 지난 지금, 넷플릭스와 국내 멀티플렉스가 다시 충돌했다. 넷플릭스가 자체 제작 영화 ‘로마’를 12일 극장에서 개봉했고 자사 플랫폼엔 14일 공개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는 미국에선 3주, 영국에선 2주 정도의 홀드백(hold back) 기간을 두고 있는 데 비해, 한국에선 거의 동시 공개를 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멀티플렉스 3사는 이번에도 이틀 시차를 둔 데 반발하며 상영을 거부했다.

소비자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만든 ‘로마’는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올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영화를 보려는 사람은 많지만 개봉관을 찾기 쉽지 않다. OTT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작품을 접하기 어렵다.

봉 감독이 말한 ‘규칙’이 마련됐다면 반복되지 않았을 일이다. 이때의 ‘규칙’은 업계에서 홀드백이라 부른다. 극장 개봉 영화를 다른 플랫폼에서 제공하기까지 걸리는 유예 기간을 말한다. 극장과 다른 플랫폼의 충돌을 막기 위한 장치다. 프랑스는 2009년 방송법에 홀드백 규정을 마련했다. 극장 개봉 후 IPTV에선 4개월, OTT 플랫폼에선 3년 뒤 작품을 제공하도록 했다.

국내엔 홀드백 관련 법규가 따로 없다.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내년부터는 막강한 콘텐츠와 자본력을 갖춘 월트디즈니, AT&T 등이 OTT 서비스로 한국에 진출할 예정인데도 말이다. 외국계 플랫폼의 공세가 본격화됐지만 관련 제도는 시장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