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초파리 학자의 눈에 비친 기초과학 현실

플라이룸
무리에서 다른 수컷들과 함께 지낸 수컷 초파리는 인위적으로 고립시킨 초파리보다 교미 시간이 길다. 경쟁자를 제치고 자손을 더 퍼트리기 위해 암컷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진 것이다. 수컷 초파리는 또한 경쟁자를 시각으로 파악한다. 이런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세계 과학자들은 초파리의 유전자와 신경을 하나씩 분석하는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했다. 그 결과 백과사전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음식에 꼬이는 귀찮은 존재인 줄로만 알았던 초파리는 진화생물학과 분자생물학 사이를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해온 것이다.

초파리 유전학자인 저자는 그러나 초파리 설명으로 책을 시작하지 않는다. 초파리 연구를 둘러싼 학계와 사회적 사건들을 먼저 보여준다. 초파리 자체보다 초파리 연구와 그 사회적 의미에 집중한 것이다. 제목인 ‘플라이 룸’은 ‘파리방’, 즉 초파리를 연구하는 실험실을 뜻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실험실 초년생 시절 미국의 거대 기초과학연구소인 자넬리아의 실적 앞에 무력해졌던 자신을 회상한다. 세상은 과학자를 논문 수, 배출한 박사학위생, 연구비 규모로 평가한다. 그 안에서 아무리 큰 헌신과 업적이라도 노벨상을 받지 못하거나 돈이 되지 않으면 잊힌다.이 책은 조그만 초파리를 중심으로 생물학과 유전학의 방대한 영역을 종횡무진 누빈다. 초파리는 더 이상 연구가 힘들 정도로 오랜 시간 다뤄진 주제지만 한국에서의 연구는 없다시피 하다. 유전자 비밀을 파헤치는 과학자의 역할은 사회가 기초과학을 보듬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꽃필 수 있다. 기초과학이 잘 뿌리내렸다고 보기 힘든 한국의 현실에서 한 초파리 과학자가 펴낸 과학, 그리고 사회 이야기가 흥미롭다. (김우재 지음, 김영사, 308쪽, 1만4800원)

주은진 기자 jinz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