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개 섬의 노래가 들리는 진도 조도면…馬 닮은 대마도는 오늘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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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E5
여행의 향기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진도 대마도
시아시·마미동 해변 경관 일품
서쪽엔 절벽 '빠진골' 전설 숨쉬어
동쪽엔 암초 '오복여' 사연 신비
해산물 풍부한 대마도 해역
전복·소라·문어 들어간 황칠보양탕 유명
겨울철 한 숟가락만 떠도 기운이 벌떡!
톳, 몰, 미역 채취해 높은 소득 올리는 섬
그런데 대마도 또한 노령화로 섬의 미래가 불안하다. 인구 소멸 지역이 되지 않기 위해 섬 주민들이 적극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섬에 살고 싶어도 외지인이 섬에 들어가 살기 어려운 이유는 어촌계 진입 장벽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어촌계에 가입해야 양식업을 할 수 있고 섬 주변 해역에서 해산물도 채취해 생활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섬 어촌계에서는 몇 해 거주 후 일정한 금액의 가입비를 내야만 어촌계 가입을 허락한다. 물론 섬 주민 생존권 보장 차원에서 어촌계 규약이 부당한 장벽은 아니다. 자원은 한정돼 있는데 무한정 나눌 수도 없다.대마도에는 대마리와 대막리 두 개 마을이 있다. 그런데 대마리에서는 근래 외지인에 대한 어촌계 진입 장벽을 허물기로 마을 총회에서 결정했다. 1년 정도의 적응 기간만 거치면 가입비 없이 양식업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로 한 것이다. 공동체가 섬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은 것이니 참으로 소중한 결정이다. 그 노력을 인정받아 대마도는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 가꾸기’ 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대마도 대마리 마을 공동체가 약속한 어촌계 진입 장벽 해소는 분명 외지 청년들의 대마도 유입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노령화되고 있는 섬이 다시 젊어질 계기를 마련한 것이니 그 의미가 크다.
해삼이 잘 자라는 대마도 바다
대마리 주민들은 어촌계 진입 장벽이 해소된 사실이 널리 알려져 대마도로 이주해 오는 청년들이 늘어나기를 소망한다. 실제로 대마리 어촌계에서는 이주해온 외지인에게 나눠줄 양식장 면적을 확보해 놓고 있다. 분배 가능한 곳은 톳 양식장 일부다. 대마리에서는 현재 13가구의 양식 어가에서 600줄의 톳 양식을 하고 있다. 대마리 어촌계에서 분할해 주려는 양식장은 시아시 해변 앞 바다인데 여기에 200줄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면허지가 있다. 가구당 20줄 정도를 나눠준다면 적어도 10가구 정도의 신규 양식이 가능한 면적이다. 현재 2가구가 대마도로 이주해 분할 대기 중이니 나머지 8가구 정도의 신규 분양이 가능하다.
대마도 바다는 해삼이 아주 잘 자란다. 그래서 중국의 장자도그룹이란 회사에서 대마도 인근 바다에 해삼 치어를 뿌려 시험 양식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직 어촌계와 정식 계약은 하지 않은 상태인데 이후 성장 상황을 지켜 본 뒤 계약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한다. 여러 해 전에도 마미동 해안에 중국 회사에서 해삼을 뿌려놓고 시험 양식을 했지만 그 후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대마도 어민들이 마미동 바다에 그물을 끌어서 엄청나게 많은 해삼을 얻었다. 대마도는 해삼 양식으로도 큰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섬이다.
조선 시대 국영 말목장으로 추정2.457㎢ 면적에 100여 명이 살아가는 섬. 대마도는 섬 모양이 큰 말처럼 생겼다고 해서 ‘대마도’ 또는 ‘대마리’라 했다고 전해진다. 1847년 《비변사등록》에는 대마도(大馬島)가 아니라 망치 마()를 써 대마도(大島)로 표기돼 있으며, 18세기 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남호남연해형편도(嶺南湖南沿海形便圖)》 ‘호남연해형편도’에는 대천도(大千島)로 기록돼 있다.
대마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제사인 당제를 지냈다. 당제는 동쪽 산허리에 있는 큰 소나무당과 마을에 있는 아랫당에서 모셨고 해안가에서는 용왕제를 모셨다. 윗당에서는 특별히 정성을 들였다. 당제 지낼 때는 제관이 정월 초하루에 제당에 올라가 3일날 내려왔다. 제관은 제물로 잡을 소를 데리고 갔는데 소가 당 앞에다 똥을 싸기라도 하면 부정 탔다고 해서 제관을 다시 뽑을 정도로 엄했다. 제관은 소변을 보면 손을 씻고 대변을 보면 목욕을 해야 돼 추운 겨울에 고생하는 것이 싫어 제 지내기 1주일 전부터 단식하기도 했다. 당제 땐 마을 주민들이 농악기를 들고 당굿도 쳤으나 1970년대에 중단됐다.
김씨 집안 할머니였는데 할머니는 늘 하얀 명주(비단) 옷을 곱게 차려입고 고고한 모습으로 있었다. 밭일이나 땔감 등 살림은 모두 할아버지 몫이었다. 누군가 아프거나 또 소원하는 일이 있으면 마을 주민들은 산신님께 아주 공손히 부탁드렸고 그러면 산신님은 사철나무에 띠를 매어두고 호롱불을 켜놓고 손으로 빌며 기도를 바쳤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도 기도해 주었는데 산신님이 곁에서 바라만 봐 주어도 산모는 편안함을 느꼈다. 아이도 더 쉽게 낳았다.
황칠로 만든 황칠보양탕 특별한 먹거리
대마도에는 시아시 해변과 마미동 해변 두 곳의 아름다운 백사장이 있는데 해수욕하기는 물론 한적하게 거닐기에도 더없이 좋다. 대마도 서북쪽에는 깎아지른 듯이 날카로운 ‘빠진골’이라는 절벽이 있는데 여기에 깃든 이야기도 애절하다. 옛날에 대마도에 장오 딸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어느 날 사랑하는 남자가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자 여인은 남자를 그리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그래서 이곳을 ‘장오 딸 빠진골’이라 한다.
대마도 인근 해역은 전복, 소라, 문어 등 해산물이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대막리에는 황칠보양탕이라는 아주 특별한 먹거리가 있다. 그 찬란한 황금빛 때문에 왕실의 칠로 통하는 황칠은 옻칠보다 더 귀한 칠이다. 황칠은 황칠나무 수액을 정제해 만드는데, 종이나 대나무는 물론 금속 공예에 도료로 쓰인다. 황칠나무는 주로 제주도, 보길도, 진도, 홍도 등 남쪽 섬 지역에서만 자생해온 귀한 나무다.
당(唐)나라 시대에 저술된 《통전 通典》에는 “백제 서남지방 바다 가운데 세 섬에서 황칠이 나는데, 6월에 백류(白流)를 채취해 기물에 칠하면 금빛과 같아서…”라는 기록이 있다. 또 《계림지 鷄林志》도 “고려의 황칠은 섬에서 난다. 6월에 수액을 채취하는데 빛깔이 금과 같으며, 볕에 쪼여 건조시킨다. 본시 백제에서 나던 것인데, 지금 절강(浙江)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신라칠(新羅漆)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부터 서남해 섬 특산물로 유명했던 것이다. 황칠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에도 신라칠(新羅漆)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는 천금목(千金木)이라 기록돼 있다.
황칠나무의 학명은 덴드로 파낙스(Dendropanax morbifera)인데 이 라틴어를 번역하면 만병 통치 나무다. 예로부터 뛰어난 약효를 인정받은 것이다. 황칠나무는 항산화작용이나 혈압, 당뇨 등의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요즘에는 칠보다 약용 나무로 쓰임새를 넓혀 가고 있다. 대마도에 자생하는 황칠나무를 이용해 차려 내는 음식이 황칠보양탕이다. 전복, 문어 등 귀한 해산물과 토종닭에 황칠나무 잎과 가지를 넣고 푹 삶아 내는 요리로, 원기 회복에 최고다. 대마도에 꼭 가봐야 할 이유 중 하나다.
강제윤 시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