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한국에는 왜 '흑묘백묘론'이 없나

"5년 정권마다 '준비된 무능' 반복
제도·윤리 붕괴 속 '극단적 스윙'
폐쇄적 사고 탈피, 실사구시 절실"

오형규 논설위원
국가경제는 시계판과 닮았다. 빠르게 도는 초침은 미시경제, 천천히 도는 분침은 거시경제, 매우 느리게 가는 시침은 세계 경제에 각기 비유할 만하다. 초침이 분침·시침과 반대로 돌면 시계는 고장 난다. 미시정책이 거시경제와 세계경제의 큰 흐름에 부합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무능인가, 아마추어인가’라는 혹평까지 듣게 된 것은 예정된 귀결이라고 할 만하다. 애초에 주력산업이 무너지는데 고(高)비용 정책으로 일관한, 경제 운전미숙 탓이다. 최저임금을 2년간 30% 올리고 주휴수당까지 밀어붙여 이젠 대기업도 범법자로 만들 판이다. 비정상도 이런 비정상이 없다.물론 지금의 경제난을 100% 현 정부의 책임으로 돌리면 억울해 할지 모른다. 그러나 ‘준비된 무능’이란 비판은 피할 수 없다. 지난 정권들이 그랬듯이 5년 임기가 ‘환호→의욕→고집→불통→반발→무능’의 수순을 밟아간다. “역사는 똑같이 반복되진 않지만, 그 흐름은 되풀이된다”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연상시킨다.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근본 문제는 내년 성장률 저하 차원이 아니다. 숱한 위기를 겪고도 도무지 달라진 게 없다. 한국 사회에는 ‘위기 극복 DNA’는 있어도 ‘위기 예방능력’은 없는 것인가. 외환보유액 4000억달러, 경상수지 80개월 연속 흑자 등 거시지표는 20년 전과 판이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 감춰진 미시경제 붕괴는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통신구 화재, KTX 탈선, 고용 비리 등에서 보듯이 제도와 직업윤리마저 무너지는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극단적 스윙’만 거듭한다. 시스템을 고도화할 생각은 않고 언제나 사람 탓만 한다.

나라 밖의 시각도 이젠 예사롭지 않다. 국제금융계 관계자는 “주요 경제대국 중에 경화(硬貨·직접 교환이 가능한 통화)를 갖지 못한 나라는 한국과 인도 정도인데, 한국은 세계 흐름에 역주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가 성장에 주력할 때 한국은 분배로, 감세일 때 증세로, 나간 기업의 유턴을 유도할 때 기업을 내모는 반(反)기업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그 대가가 ‘나홀로 불황’이요, 올 들어 7조원의 외국인 주식순매도다. 해외 투자자들은 한국의 위기대처 능력과 예측가능성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반도체 경기마저 꺼지면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위기의 징후들이 한꺼번에 떠오를 공산이 크다. 허약해진 나라에 국제 투기자본은 병원균과 같다. 머릿속(정쟁)이 복잡하고, 운동(구조조정)은 안 하며, 나쁜 것(역주행 정책)만 먹고, 마약(정치 포퓰리즘)에 취해 있으면 어김없이 창궐한다.

최근 문 대통령이 부쩍 경제 챙기기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지난 1년 반을 허송한 탓에 경제회복이 더 힘겨워 보인다. 내년 경제정책 방향에 대해 민주노총은 “노동자·서민의 나라는 좌우 깜빡이를 모두 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는 성명을 내놨다. 왼쪽으로 가면 낭떠러지, 오른쪽으로 가면 장애물이 기다리는 형국이다.

국민들 사이에선 “이 정부에 희망이 사라진 지 오래고, 제발 국민 세금만 축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온다. 기업인들은 “투자가 무너지고 업종마다 죄다 중국 등에 따라잡힐 판국에 편가를 때냐”고 호소한다. 경제활력 회복을 위해선 몇몇 미시정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가 절실하다. 백 마디 말보다 당장 하나라도 실천해 경제주체들의 신뢰부터 회복해야 할 것이다.하지만 대통령이 산업계 애로를 듣겠다는데, 참모들은 기업 기 살리기조차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으로 나누겠다는 식이다. 경제는 ‘개방계’인데 정책마인드는 ‘폐쇄계’적 사고방식에 갇혀 있다. 좌파 경제관의 근본 맹점이기도 하다.

근본주의 공산국가였던 중국은 개혁·개방 40년간 시장경제를 통한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오늘의 성공을 이뤄냈다. 그 바탕이 된 ‘흑묘백묘론’이 가장 절실한 게 지금의 한국이다. 꺼져가는 경제를 살릴 수만 있다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뭐가 문제겠나.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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