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누가 산업정책을 죽였나

"산업정책, 없는 게 아니라 파괴돼
정치·환경단체·노조가 산업 접수
'산업 不姙國' 전락할까 두렵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박사
과거 미국이 영국을 추격할 당시 알렉산더 해밀턴 재무장관이 작성한 ‘제조업 육성 보고서’를 보면 미국의 산업정책도 지금의 중국 못지않았다. ‘중국 제조 2025’를 비난하고 있는 지금의 미국은 산업정책을 구사하지 않고 있을까?

미국의 산업정책은 진화를 거듭하면서 국방·과학·기술·혁신·교육·조세·이민정책 등으로 흩어졌을 뿐, 살아 있다. 미국은 글로벌 주도권을 쥐고 있는 금융·통화정책, 안보·통상·외교정책 등을 산업정책의 무기로 활용하기도 한다. 미·중 무역전쟁만 하더라도 ‘워싱턴 컨센서스’에 숨겨진 미국식 산업정책과 ‘베이징 컨센서스’로 무장한 중국식 산업정책 간의 ‘예정된 충돌’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이런 가운데 일본, 독일 등은 그들대로의 강점을 살린 산업정책을 펴고 있다.문재인 대통령이 산업통상자원부 업무보고에서 “일각에서는 산업정책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며 “뼈아픈 자성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달라지는 모습은 반갑지만,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산업정책이 없는 게 아니라 “파괴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산업부에 던진 ‘탈(脫)원전’ 미션부터 그랬다. 환경단체들이 에너지정책을 장악하면서 경쟁력이나 가치사슬, 국산화 등의 개념들은 설 땅을 잃었다. ‘환경 도그마’에 멀쩡한 기업이 망하든 말든, 원전 산업 생태계가 붕괴하든 말든 태양광·풍력 등을 수입해서라도 보급률 목표만 채우면 된다는 게 이들이 말하는 ‘에너지 전환’이다. “‘시민·환경단체 실패’가 ‘시장 실패’, ‘정부 실패’보다 더 무서운 세상이 됐다”는 말까지 나온다.

황당하기는 ‘혁신성장’이란 이름의 프로젝트들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지난해 12월 경제정책방향에서 전격적으로 공개한 혁신성장 8대 선도사업(초연결 지능화, 스마트공장, 스마트팜, 핀테크, 재생에너지, 스마트시티, 드론, 자율주행차)이 무슨 기준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선정된 건지 아는 사람이 없다. 대선 캠프에서 ‘예시’로 제시한 게 최소한의 공론화나 검증 절차도 없이 그대로 정부의 혁신성장 선도사업이 돼 각 부처가 하나씩 떠맡았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정치가 혁신성장 사업까지 좌우할 지경이면 산업정책이 할 일은 없다.산업정책에서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이자, 자본·노동 등 자원의 이동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구조조정’은 이 정부 들어 금기어가 되다시피 했다. 거대 노조가 반대하면 무엇 하나 변화를 꾀할 수 없는 환경이다. 이것도 모자라 사회적 대화기구라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까지 산업 구조조정에 개입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금융·해운·보건의료위원회에 이어 조선 등 다른 산업위원회도 구성할 태세다. 전 산업에서 구조조정이 봉쇄될 날이 머지않은 형국이다.

선진국의 산업정책이 혁신정책으로 진화하면서 개인과 기업의 혁신역량을 폭발시키기 위한 핵심 아젠다로 삼는 규제개혁도 우리 현실에서는 반대로 가고 있다. 경쟁국들이 완화하거나 폐지하는 규제를 우리만 기득권 세력에 막혀 풀지 못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자해적’ 산업정책이나 다름없다.

대통령은 “산업정책의 사령탑은 산업부 장관”이라고 했지만 정치, 시민·환경단체, 거대 노조가 산업을 접수한 현실에서 산업정책은 불가능하다. 설령 산업정책이 나오더라도 그건 껍데기에 불과할 게 뻔하다. 오죽하면 사퇴를 밝힌 김광두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이 “기업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투명한 적폐청산의 범위와 기준을 제시하고 노조의 불법행위는 막아줘야 한다”고 했겠나.밖에서는 우리가 한창 말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을 넘어 ‘그 다음 혁명’이 무엇이냐를 놓고 논의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한국이 ‘산업 불임(不姙) 국가’로 전락하는 게 아닌지, 그게 두렵다.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