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자…명예는 그에게 주어지는 '훈장'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읽기 (33) 명예(名譽)

'획득한 명예'
집안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전쟁에 참여해 전공 세우는 등 개인이 노력을 통해 얻어낸 결과

그리스 장군 아이아스
트로이전쟁 참전해 큰 공 세워, 아킬레우스의 갑옷·투구 받는 자
'최고의 군인' 명예 얻게 되는데 오디세우스에 영광 내주며 실의
기원전 510년께 제작된 ‘전사한 아킬레우스를 나르는 아이아스’(테라코타, 38.1㎝×27.9㎝).
고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중 한 명인 투키디데스(기원전 460~400년)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라는 불후의 저서를 남겼다.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 후반 거의 30년 동안 스파르타와 내전을 벌였다. 이 전쟁을 기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그 범위와 간결함, 정확도에서 역사서술의 전범이라 불릴 만하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가 저술한 《역사》와 달리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에 직접 참전한 장군으로 자신이 실제로 목격한 내용을 생생하게 기술했다. 고대 아테네인들에게 기원전 5세기 전반 치른 마라톤 전쟁과 살라미스 전쟁은 오히려 쉬웠다. 그들은 외부의 적인 페르시아에 맞서 합심해 싸웠기 때문이다.그러나 내전인 스파르타와의 전쟁은 마침내 그리스가 어렵게 성취한 아테네 민주주의의 붕괴로 이어져, 아테네가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투키디데스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왜 아테네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가? 어떻게 정치가 사회나 개인을 고양시키거나 혹은 망가뜨릴 수 있는가? 누가 위대한 리더인가? 아테네가 퇴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아테네가 퇴락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테네를 떠받치고 있던 ‘명예’가 비웃음거리로 전락해 사라져 버렸다.”

아레테

고대 그리스인은 모든 인간에겐 각자에게 알맞은 ‘개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개성은 각자가 발견하고 수련해야 할 신의 선물이다. 그들은 아테네에서 운명적으로 각자 다른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공동체인 ‘도시’ 안에서 자기 나름의 탁월함을 발휘한다.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을 통해 자신의 탁월함을 드러낸다. 고대 그리스어로 경쟁은 ‘아곤(agon)’이다. 인간은 아곤을 통해서만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탁월함은 고대 그리스어로 ‘아레테(arete)’다. 아레테는 흔히 ‘덕’으로 번역되나, 고대 그리스인들이 염원한 인간의 최선을 총체적으로 담은 단어다. 아레테의 의미는 실로 다양하다. ‘선, 탁월함, 남성다움, 힘, 용기, 덕, 성격, 명성, 영광, 위엄’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적, 경의, 경배의 대상’이란 의미도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지도자는 아레테의 화신이다. 아테네인들은 자신의 아레테를 어김없이 발휘한 자를 투표를 통해 선출했다.

그들은 이런 과정을 통하지 않고 왕권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행위를 ‘바바로스’, 즉 ‘야만적’이라고 말했다. 야만인을 의미하는 ‘바바리안(barbarian)’이 여기서 파생했다. 즉 야만인은 자신만의 고유한 아레테가 무엇인지 몰라 발휘하지 않는 어정쩡한 인간이다. 아레테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최선’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물건에도 아레테가 있다. 굴뚝도, 황소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만의 기능이 있다. 아레테의 원래 의미는 ‘자신의 삶을 우주의 질서에 맞게 연결시킨 것’이다. 인간 자신이 시공간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묵상을 통해 깨달아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을 바로 아레테라고 부른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아레테를 ‘인간 노력의 탁월함’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아레테를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내면에서 노력하는 과정에 서서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레테는 자신이 최선을 이루겠다는 결심과 노력이다. 운동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지속적인 마음이다. 무엇을 이뤄야겠다는 확신, 이를 지속적으로 완성해 나가려는 겸손에서 아레테는 시작한다. 그리스 교육체계는 암기가 아니라 참여다. 매일 체육관에서 운동을 통해 육체를 연마하며, 그동안 알지 못하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는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 무아(無我) 상태를 연마해 정신적인 최선을 지향한다. 거기에는 사지선다가 없다. 시험에서 중요한 것은 좋은 성적이 아니라 경쟁이다. 이들은 육체적으로 올림픽 경기를 통해 경쟁하는 것처럼 시·산문·연극·음악·그림·연설을 통해 아레테를 연마했다.아리스토크랫

‘아리스토크랫(aristocrat)’이란 영어단어는 흔히 ‘귀족’으로 번역되는데, 숨겨진 본래 의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달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넓은 의미에서 귀족은 자신이 하는 일을 천직이라고 깨닫고 묵묵히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서양문명의 시작은 아레테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한다. 기원전 750년 호메로스는 450년 이상 구전으로 내려온 서사시를 그리스어 문자로 처음 옮긴다. 고대 그리스에는 기원전 2000년대부터 음절문자인 크레타 섬에서 발견된 선형문자 A와 미케네 섬에서 발견된 선형문자 B가 있었다. 이 문자들은 노래를 기록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호메로스는 페니키아 상인으로부터 페니키아 문자를 변형해 고대 그리스어 문자를 창제했다. 이 문자로 기록된 서사시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다.명예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아킬레우스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으로 아레테를 발휘한다.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함락하러 갔지만, 아킬레우스의 도움 없이는 그 전쟁을 이길 수 없다. 《일리아스》에 처음으로 등장한 아레테라는 개념은 바로 아킬레우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용맹성’을 의미한다. 후에 등장하는 그리스 교육과 그리스 올림픽은 바로 이 육체적 탁월함인 아레테를 연마하는 장소다.

아레테를 가장 많이 연마한 자들인 ‘귀족’은 자신에게 주어진 육체적·정신적 환경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을 끊임없이 한다. 타인의 다양한 마음을 진실로 이해하고 그들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이 바로 공부다. 이런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자신의 것처럼 상상하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이에 따라 공동체는 그를 지도자로 인정하고 자연스레 그를 ‘선’과 ‘명예’의 화신으로 여긴다. 이 명예를 그리스어로 ‘티메(time)’라고 부른다.

명예는 탁월한 인간이 지니는 재화이며 가치다. 공동체는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행동으로 보여준 개인에게 ‘명예’를 부여한다. 한 공동체나 도시는 탁월함을 통해, 명예를 지닌 자들을 통해 그 가치가 결정된다. 단테의 정신이 이탈리아를 만들었고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힘이다. 괴테가 독일정신이며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가치 있게 만들었다. 우리는 명예를 개인에서 시작해 외부인이 인식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명예는 정반대로 생성되고 작용한다. 공동체는 한 개인의 탁월한 행위를 통해 그가 지닌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면 공동체는 그에게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인 명예를 수여한다.

우리는 명예를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한 가지는 ‘주어진 명예’다. 한 개인이 속한 가족이 이미 부와 권력을 지녔다면 그 집안에서 태어난 자는 그 명예를 자연스럽게 부여받는다. 고대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첫째 아들이 다른 자녀보다, 남성이 여성보다 명예를 누렸다. 이 명예와는 다르게 개인이 노력을 통해 ‘획득한 명예’가 있다. 개인은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명예를 획득할 수 있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다. 그는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인 ‘불멸의 명성’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고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다.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아이아스》는 기원전 444년께 만들어졌다. 그는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제기한 인간의 탁월함과 탁월함이 가져다주는 명예가 무엇인지 아테네 시민들에게 묻는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를 함락해 명성을 얻지만, 그 자신은 사망한다. 아킬레우스가 죽은 뒤 그리스인들은 ‘누가 가장 위대한가’를 결정한다.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아킬레우스를 위해 만들어준 갑옷과 투구를 받는 자가 공개적으로 최고의 군인으로 ‘명예’를 얻을 것이다.

누구에게 명예가 갈 것인가?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두 사람을 내세워 경쟁시킨다. 한 명은 아킬레우스와는 달리 언변의 탁월함을 지닌 오디세우스고, 다른 한 명은 아킬레우스와 비슷하게 전쟁에서 용맹성을 떨친 아이아스다.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와는 다른 아레테를 지녔다. 그는 행위가 아니라 말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말솜씨를 지녔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아킬레우스처럼 죽지 않고 살았을 뿐만 아니라 고향 아타카로 항해하는 동안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사이렌과 같은 여신의 유혹을 대화로 설득해 자신의 뜻을 이룬다. 아레테는 육체적인 탁월함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언변의 탁월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이아스는 그리스 연합군 중 몸집이 가장 크고 힘이 센 영웅이다. 그는 ‘아케아인들(그리스인들)의 성벽’이라고 불렸다. 그는 아킬레우스와 함께 반인반마 괴물 케리온에게 훈련받은 최고의 군인이다. 아이아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과 무기를 자신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에게 명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아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이 오디세우스에게 주어지면서 시작한다. 아이아스는 이 수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