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갑영 칼럼] '바나나 공화국 위기' 극복한 키팅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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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의료보험 포함, 10년 개혁 성공한 키팅“이대로 가면 우리는 결국 3류 경제로 전락해서 ‘바나나 공화국’이 될 것입니다.” 1986년 당시 호주 재무장관이었던 폴 키팅이 경제 회생을 위해 급진적인 개혁이 절실하다며 국민들을 설득했던 유명한 말이다. 바나나 공화국은 ‘마지막 잎새’의 저자 오 헨리가 단편 ‘양배추와 왕’에서 중남미의 온두라스 등과 같이 자연자원에만 의존하거나 독재로 부패된 가상 국가를 경멸스럽게 지칭한 말이다. 키팅은 석탄과 철광석 등 1차 산품에만 매달린 호주 경제의 구조적 위험을 간파한 것이다. 그는 재무장관을 거쳐 총리를 지내며 10여 년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변동환율제 도입과 수입 쿼터제 폐지, 금융산업 규제완화, 국영기업 민영화 등을 이뤘고, 임금도 정부와 노조의 협상에서 기업 단위의 교섭으로 전환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호주는 키팅 덕택으로 바나나 공화국의 위기를 모면하고 부러움을 사는 선진국으로 탈바꿈했다.
국가부채 줄이고 27년 연속 성장 기반 다져
韓, 연금 등 개혁 미루면 3류경제 전락 우려
정갑영 <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前 총장 >
오늘날 미국과 일본, 영국 등 선진권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 중위권 소득이 정체돼 근로자의 분노가 들끓고, 공공부채는 천정부지로 늘어나는데 인구 고령화로 연금과 의료보험 재정은 고갈되고 있다. 따라서 소득 증가는 물론 공적 부채를 줄이면서도 선진국다운 복지를 유지하기 위한 묘책에 부심하고 있다.그런데 놀랍게도 호주는 이 모든 현안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모범 국가가 됐다.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특집으로 다룬 ‘호주의 규칙(Aussie Rules)’에서 인용해 보자. 호주 경제는 선진국 최초로 1991년 이후 지난 27년간 단 한 번의 침체도 없이 연속 성장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고 있다. 이 기간 성장률은 독일보다 3배 높고, 중위권 소득은 미국보다 4배 증가했다. 1997년과 2008년의 글로벌 위기에도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국가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42%로 영국의 절반에 불과하며, 일본(240%)과 미국(108%)은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인 73%와 비교해도 놀랄 만큼 건전하다.
적극적인 이민정책 덕에 고령화와 인구 감소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민자 비율이 이미 인구의 29%나 된다. 특히 숙련된 전문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경제의 첨단화를 위한 동력으로 활용하고 있다. 물론 절대 인구가 부족한 호주의 특성에서 비롯된 예외적 현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것 역시 다양성을 적극 수용하려는 개방적 문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성장이나 이민정책보다도 호주 경제가 더 부러움을 사고 있는 것은 연금과 건강보험의 재정 건전성 때문이다. 1990년대 초 노동당의 키팅 총리가 대대적인 연금 및 의료보험 개혁을 단행한 결과다. 핵심은 중산층의 부담을 높이고,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분담하는 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즉, 소외계층은 정부가 책임을 지지만 나머지는 필수 서비스만 정부가 부담하고 개인별 민간보험으로 이전시켰다. 연금 역시 노사(勞使)가 공동으로 민간연금에도 불입하도록 강제화해 세제 혜택을 기반으로 공적 부담을 시장과 공유하는 개혁도 일찌감치 정착시켰다. 이 결과 호주는 GDP에 대한 공적연금의 부담 비율이 4% 수준으로 선진권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으며, 이 격차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바나나 공화국의 비극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당장 연금과 의료보험 개혁은 우리에게도 발등의 불이다. 최근 개편안은 결국 낼 사람은 사라지는데 지금 세대만 많이 받겠다는 것이다. 여야 모두 아직 투표권이 없는 차세대와 미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인기를 거스르는 개혁도 없이, 부담도 늘리지 않고, 시장과 민간을 외면한 채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달콤하게 포장해서 더 큰 부담을 다음 세대로 떠넘기기에 급급하니 3류 경제로 가는 길이 머지않아 보인다. 자연자원이 없는 우리는 바나나 공화국조차도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키팅과 같은 리더십도 찾아보기 힘드니 그저 안타깝기만 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