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독립신문 창간 서재필

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인간의 권리는 하늘이 내린 것이니 그 누구도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되오.”

열강들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1890년대 말,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서재필 박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민공동회는 서재필이 주도해 조직한 독립협회가 벌인 정치활동의 하나. 누구나 참여하는 대중 집회로 노비제 폐지, 의회제도 도입 등 혁신적인 개혁 안건들이 올라왔다.서재필은 1864년 대구 서씨 진사 서광효와 성주 이씨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먼 친척 서광하의 양자로 들어간 뒤 과거에 급제한 그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등 개화파와 친분을 쌓았다. 1884년 개화파와 함께 벌인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이후 미국으로 떠났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궂은일을 하며 컬럼비아대 의학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어 이름은 필립 제이손.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복권된 뒤 그는 1896년 중추원 고문 신분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우리나라 최초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만민공동회를 여는 등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를 견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서 그는 한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해방 이후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기 위한 운동이 벌어졌지만 그가 미국 국적인 점이 문제시돼 성사되지 못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5일 필라델피아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홍윤정 기자 yj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