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사상 최초 전직 대법원장 검찰조사…'양승태 입'에 주목

임종헌 전 처장 묵비권 행사…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은 혐의부인
양승태, 김앤장 쪽과 강제징용 소송 논의 정황…검찰, 관련 증거 다수 확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최종 책임자로 지목되는 양승태(71) 전 대법원장이 오는 11일 검찰에 출석하는 가운데 그가 조사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검찰은 구체적 물증과 진술을 다수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양 전 대법원장이 어떤 대응 전략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6일 검찰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양 전 대법원장에게 11일 오전 9시 30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를 받는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라고 통보했다.

전직 대법원장이 피의자로 검찰 조사를 받는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다.구속 수사를 받고 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이 연결고리에 해당하는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검찰은 한 달간 강도 높은 보강 수사를 벌인 끝에 박·고 전 대법관에 대한 영장 재청구 없이 바로 양 전 대법원장을 소환했다.

'임종헌→박병대·고영한→양승태'로 이어지는 양승태 법원행정처 보고·지시 체계 가운데 임 전 차장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박·고 전 대법관은 혐의를 부인하면서 일부 사안에 대해선 부당한 업무를 시키지 않았지만 '과잉 충성'을 한 것이라며 후배 판사들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했다.양 전 대법원장 역시 검찰 조사에서 혐의를 부인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양 전 대법원장이 재판 개입,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 등의 혐의를 인정하는 순간 그 지시를 받아 실무자에게 전달한 박·고 전 대법관과 임 전 차장 모두 직권남용 혐의의 공범이 된다.

한 배에 탄 '공동운명체' 같은 구조로 얽혀 있는 셈이다.검찰 수사 과정에서 임 전 차장 등이 상급자인 양 전 대법원장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런 점을 고려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앞서 양 전 대법원장은 작년 6월 경기도 성남시 자택 앞에서 연 회견에서 "대법원장으로 재임했을 때 재판에 부당하게 관여한 적이 결단코 없으며 재판을 놓고 흥정한 적도 없다"고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부인했다.

그러나 그가 모든 의혹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모르쇠 전략'을 쓰거나 묵비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검찰이 확실한 물증이나 구체적 진술을 확보했다고 자신하는 혐의가 상당 부분 있기 때문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일제 강제징용 소송을 지연시키고, 일본 전범 기업에 배상책임이 없다는 쪽으로 기존 대법원판결을 뒤집는 데 직접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일본 전범기업인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 등을 대리한 김앤장 법률사무소를 지난해 11월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김앤장이 강제징용 소송 절차를 양 전 대법원장 측과 논의한 결과를 담은 문건을 확보했다.

이 문건에는 외교부가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면 대법원이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는 계획 등 양 전 대법원장과 김앤장 송무팀을 맡은 한상호 변호사가 2015∼2016년 3차례 이상 독대한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앤장 고문으로 있던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과 곽병훈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 등이 임종헌 전 차장과 여러 차례 접촉해 강제징용 소송을 논의한 정황도 담겨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양 전 대법원장과 박·고 당시 법원행정처장은 판사 블랙리스트로 불리는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검토' 문건에자필로 결재한 사실도 드러났다.
양 전 대법원장은 몇 달 전부터 변호인을 선임해 검찰 수사에 대비해온 만큼 임 전 차장의 공소장과 박·고 전 대법관의 진술 내용을 분석해 개별 혐의마다 자신의 책임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전략을 들고나올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박·고 전 대법관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 이후 다른 전·현직 대법관들을 불러 양 전 대법원장 혐의와 관련된 조사를 집중적으로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법원행정처 보고 체계가 처장만 원장에게 보고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라며 "박·고 전 대법관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은 큰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여서이지 단순히 양 전 대법관에 이르기 위한 단계로 본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박·고 전 대법관을 거치지 않고 양 전 대법원장으로 바로 이어진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도 있었다는 것이다.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개입한 정황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를 얼마나 확보했느냐에 따라 양측의 팽팽한 '수 싸움'의 성패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