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원 이상 거래 5년치 제출하라"…행정조사권 남용하는 정부

압수수색식 '행정조사' 논란

국회서 확산되는 '행정조사기본법' 개정 움직임

공정위, 전방위 포괄조사 '악명'…국감서 지적 받아
환경부, 작년 72건 최다…저공해車 구매실적 요구도
靑·국세청·공정위 등 '사정기관'은 실태 파악도 안돼
지난해 6500곳에 달하는 의료기기 업체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의료기기 생산 및 수입량과 단가, 금액을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영업 기밀에 해당하는 내용을 아무런 법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무조건 제출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2000여 곳이 넘는 상장사는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내부거래 3년치를 보고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A기업 관계자는 “법 위반 혐의가 있는 기업만 조사하는 것도 아니고 상장사의 계열사 간 거래를 모두 뒤져보겠다는 요구여서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규제본능 발동한 정부의 ‘행정조사권’

공정위는 특히 ‘경제 검찰’이라는 사실상 사정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해 전방위 포괄 조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공정위는 2017년 3월 대기업 집단 45개에 속한 225개 기업에서 12만 건 이상의 거래 내역을 제출받았다. 계열사 간 ‘일감몰아주기 실태조사’를 이유로 들었다. 제출 범위도 5년치, 100만원 건 이상 거래내역은 모두 내라고 요구했다.

당시 국정감사에서 과잉조사 논란이 불거지자 공정위는 다음해에 ‘공시 점검’을 이유로 2083개 회사에 공문을 보내 자료제출을 요구했다. 공시이행 여부를 보겠다는 ‘명분’만 바꿨을 뿐 ‘전체 기업’을 대상으로 똑같은 자료를 내라고 한 셈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형식상 자료 협조지만 공정위의 요청을 거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환경부는 지난해 모든 정부 부처를 통틀어 가장 많은 72건의 행정조사를 벌였다. 이 중에는 다중이용시설 실내 공기질 측정 및 결과 보고, 석면안전관리 보고 및 검사, 화학물질 배출량 조사, 통합관리사업장 오염도 측정 등의 내용이 있다. 이 가운데 ‘저공해 자동차 구매실적 보고’ ‘통합사업장 실적 보고’ 등과 같은 ‘환경규제’와 직접적 연관이 작은 항목도 있다.

중복 조사 우려도 제기된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해 12월 네이버의 ‘시장 불공정 행위’를 조사하기로 했다. 이는 공정위가 이미 조사 중이었다. 방통위는 이 같은 지적을 의식한 듯 “공정위와 조사가 겹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민간기업을 ‘잠재적 범법자’로 간주민간기업들은 정부 부처의 행정조사가 전방위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행태로 변질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행정조사의 바탕에는 기업을 잠재적 법 위반자로 보는 시각이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청와대를 비롯해 국세청·공정위·금융감독원 등 이른바 ‘사정기관’으로 분류되는 곳은 행정조사기본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 조사자 보호에 관한 규정을 위반하더라도 처벌은커녕 ‘면책’ 특혜까지 받는다. 국회 정무위 관계자는 “주요 권력기관은 매년 얼마만큼의 행정조사를 하는지 기본적인 점검도 받지 않는다”며 “공정위 등은 행정조사를 얼마나 해왔는지에 관한 통합자료조차 없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하도급 선정의 적정성을 조사한다’는 이유로 모든 건설업체에 하도급 계약을 전부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과잉조사라는 논란이 일자 건설산업종합정보망에 입력된 자료를 검토해 기준 미달 업체를 선별하는 조사 방식으로 바꿨다. 식약처도 민간기업의 기밀을 무작위로 요구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단가 정보 등은 제외한다고 슬쩍 조사 내용을 변경했다. 식약처 관계자는 “의료기기법 13조에 따르면 (의료기기 생산 수입 단가 등은) 국가 통계 구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사로 규정돼 있다”고 해명했다.한국법제연구원은 “조사를 수행하는 공무원에 대한 제재 규정이 없는 것이 문제”라며 “기존 법은 수시 조사의 필요성이 지나치게 폭넓게 인정되면서 민간 기업의 자기보호 권한이 침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행정조사

행정기관이 정책 결정과 직무수행에 필요한 정보 및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일체의 행위를 뜻한다. 행정조사기본법(제2조 1항)에 명시돼 있으며 정부 기관이 민간 기업 등에 자료 제출·현장 조사·문서 열람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