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이대리] 연말정산에 대처하는 직장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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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의 월급'이라는데 왜 나만 토해내나 ㅠㅠ전자제품 제조업체에 다니는 2년 차 직장인 이 사원(29)은 지난해 연말정산을 떠올리면 쓴웃음이 난다. 당시 아무런 대비 없이 연말정산을 했다가 50만원에 달하는 돈을 토해냈기 때문이다. 그는 미혼이고 큰돈을 쓴 적도 없는 데다 연금저축, 개인형 퇴직연금(IRP) 등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금융상품에도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뒤 이런 낭패를 피하려고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금융상품에 가입하고 공제율이 큰 체크카드 사용을 생활화했다.
올해는 '연말정산 때 돈 버는 법' 유튜브 열공!
금융맨도 헷갈려요
은행원이라고 친구들 문의 많아 "매년 조항 바뀌는데…" 진땀
연말이면 국세청 문서 '정독'
준비한 만큼 더 받는다
은퇴한 시아버지 소비내역 보다 5년간 처리 안된 연말정산 발견
"수십만원 돌려받을 생각에 설레"
이뿐만 아니다. 유튜브에서 ‘연말정산 토해내지 않는 법’ 등 동영상을 보며 공부도 한다. 남들은 유난 떤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이 사원은 “재테크 공부는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연말정산을 우습게 보는 건 잘못”이라며 “지금처럼 금리가 낮을 때는 적금에 드는 것보다 세제 혜택을 받는 게 유리하다”고 말했다.혹자는 연말정산을 ‘13월의 월급’이라고 부른다. 연말정산으로 돌려받는 돈이 많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훈훈한 사례’는 찾기 쉽지 않다. 그보다는 돈을 더 내게 돼 ‘멘붕’이 오거나 쥐꼬리만큼 돌려받기 위해 번거로운 서류 처리를 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연말정산을 둘러싼 김과장 이대리들의 애환을 들어봤다.
더 토해낸 아픈 기억…“반복 않겠다” 열공
국회 야당 의원실에서 일하는 이 보좌관(33)은 올해 여느 때보다 아내의 수입·지출 내역을 꼼꼼히 파악하며 연말정산을 준비하고 있다. 매년 돈을 돌려받다가 지난해 처음으로 70만원가량을 더 냈기 때문이다. 이 보좌관은 국세청에 문의해 아내가 휴직했을 때 지출 처리를 잘못한 게 원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아내는 소득이 없기 때문에 지출을 이 보좌관이 한 것으로 처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이 보좌관은 “지난해 5월 재신청을 통해 돌려받을 기회도 있었지만 이마저도 바쁜 업무로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중견 식품회사에 다니는 이 주임(29)은 아직도 연말정산이 낯설다. 입사 초기에 100만원 넘게 토해냈던 기억이 있어 지난해에는 이를 갈고 준비했지만 이번에도 놓친 게 많았다. 대표적인 게 주택청약종합저축통장이다. 연말정산에서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고 주택 마련까지 생각하면 일찍 가입할수록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 작년 초 은행 창구를 찾아가 서둘러 가입했다. 그런데 막상 작년 연말정산 모의계산을 돌려보니 주택청약종합저축 내역이 잡혀 있지 않았다. 이 주임은 “연봉 등 기타 조건을 모두 충족했지만 ‘무주택 확인서’를 내지 않아 누락됐던 것”이라며 “주변 지인들에게 조언을 많이 듣고 다녔는데 또 이런 복병이 곳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고 푸념했다.
시부모님 덕택에 연말정산 횡재 사례도
드물지만 연말정산으로 횡재를 하는 사례가 있다. 화학회사 재무팀에서 일하는 김 대리(33)는 올해 연말정산 결과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시부모님 덕택에 수십만원을 돌려받을 가능성이 높아서다. 기술자로 일했던 시아버지는 최근 일을 그만둬 소득이 많이 줄었다. 이 영향으로 시부모님 내외가 모두 남편의 의료보험 피부양자가 됐다. 김 대리는 남편 명의로 관련 비용을 공제받기 위해 시부모님의 연말정산 내역을 확인했다.그 결과 두 분이 최근 5년간 신용카드와 의료비 등으로 큰돈을 쓰고도 이를 연말정산으로 처리하지 않은 걸 발견했다. 연세가 드신 터라 복잡한 행정처리를 못했던 것이다. 그는 신용카드 등 내역이 뻔히 보이는 소비도 연말정산을 안 하면 반영이 안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시부모님이 부양가족으로 등재되기 전에 쓴 돈도 현재 부양가족이 됐다면 남편이 혜택을 볼 수 있다. 김 대리는 “지금껏 이런 걸 챙긴 적이 없다고 하시니 5년치 경정청구부터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말정산 무관심족’도 있다. 서울 대기업에서 일하는 양 과장이 그런 사례다. 그는 부양가족도 없고 의료비도 많이 안 쓴다. 연말정산에서 유리한 점이 거의 없다. 최근에는 돈을 모아 집을 샀는데 이것도 걱정이다. 임차인 생활을 할 때보다 연말정산에서 불리하기 때문이다. 양 과장은 “처음에는 다른 사람처럼 기대했는데 쥐꼬리만큼 돌려받거나 더 내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오히려 이제는 무덤덤해졌다”고 했다.
진땀 흘리는 금융맨 “연말정산, 나도 몰라요”연말정산을 무분별한 소비에 대한 ‘반성의 계기’로 삼는 사람도 있다. 법무법인에 다니는 정 대리(29)는 연말정산을 위해 자신의 소비 내역을 확인했다가 두 눈을 의심했다. 한 해 동안 무려 4500만원을 쓴 것이다. 신용카드 사용액만 4000만원이 넘었다. 정 대리는 “작년에는 한 푼이라도 더 공제받으려고 노력했는데 올해는 지출액 대부분이 신용카드여서 공제액도 많지 않을 것 같다”며 “올해엔 적금이라도 하나 더 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직을 한 사람은 이전 직장에 연락해 필요한 서류를 요청하는 어색함을 겪기도 한다. 지난해 말 부동산 관련 업체로 이직한 정 과장이 그런 사례다. 그는 최근 연말정산과 관련해 전 직장에 연락했다가 “직접 와서 확인한 뒤 찾아가라”는 말을 들었다. 정 과장은 “나쁜 일로 나온 것도 아니고 좋은 제의를 받아 이동한 것인데도 다시 이전 회사에 방문하는 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금융맨들은 연말정산 기간에 각종 민원을 처리해 주느라 진땀을 뺀다. 시중은행에 근무하는 박 과장(34)은 매년 1월이면 친척이나 친구들 연말정산 문의를 받느라 정신이 없다. 박 과장이라고 관련 내용을 제대로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잘 모른다며 문의를 물리치지도 못한다. 박 과장은 자존심 때문에 국세청 문서를 정독하며 안내해준다. 그는 “은행원들도 연말정산할 때면 ‘소득공제율이 높은 체크카드를 더 쓸걸’ 하고 후회하는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라고 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