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거부들의 패밀리오피스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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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 현금부자 이상록 전 카버코리아 회장 ‘너브’ 세우고 20여곳 공격투자≪이 기사는 01월22일(15:10)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A.H.C’ 브랜드로 유명한 에스테틱 화장품 전문업체 카버코리아를 2017년 글로벌 화장품 회사 유니레버에 매각해 1조원이 넘는 현금을 손에 쥔 이상록 전 카버코리아 회장(현 너브 회장)이 영화제작사, 디자인 회사, 항균필터 회사 등 비상장사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자산관리를 위해 설립한 패밀리오피스 ‘너브’를 통해서다.
이 회장처럼 회사를 팔아 수천억원의 거금을 손에 쥔 ‘젊은 거부’들이 자산관리를 위한 패밀리오피스를 잇따라 세우고 있다. 자유로운 투자활동을 통해 자산을 증식·관리하면서 성장산업 육성에도 기여하기 위해서다. 김정주 넥슨 회장,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이정웅 선데이토즈 전 대표 등도 패밀리오피스 설립에 나선 대표주자들이다.
패밀리오피스는 부호들이 집안의 자산을 운용하기 위해 세운 개인 운용사를 뜻한다. 운용 규모가 최소 1000억원 이상이고, 자산운용사 자선재단 헤지펀드 등 다양한 형태를 띤다. 부호들의 재산 증식과 자산배분, 상속·증여 등을 돕는 전문 업체도 있다.20개 회사 공격투자한 ‘너브’
이 회장은 ‘이보영 크림’으로 유명한 화장품 회사 카버코리아를 사모펀드(PEF) 운용사 베인캐피탈과 글로벌 화장품 회사 유니레버에 분산 매각하면서 1조원이 넘는 현금부자가 됐다. 40대 나이에 조단위 부자가 된 그의 행보에 관심이 쏠렸다. 이 회장의 선택은 패밀리오피스 설립이었다. 네이버와 로펌 등에서 인재들을 끌어모았다.
영화 특수효과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는 모팩, 브랜드 디자인회사 엑스플러스, 영화배급사 에이스메이커, 영화제작사 B.A.엔터테인먼트, 컨설팅 회사 SR컨설팅, 음식 프렌차이즈 표준F&B, 연예기획사 사람엔터테인먼트 등이 모두 너브의 투자를 받은 회사다. 너브는 설립 1년만에 20여 곳 회사에 약 650억원 돈을 넣은 것으로 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패밀리오피스는 일반 자산운용사보다 자유로운 투자가 가능하다”며 “제도권 금융사가 접근하기 어려운 다양한 투자 영역을 개척하면서 수익을 낼 수 있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최근 이 회장은 너브를 통해 2대 주주 지분을 확보한 항균필터 제조사 씨앤투스성진과 함께 합작법인 ‘필트’를 세웠다. 씨앤투스성진의 필터 제작 노하우를 접목해 미세먼지 방지 마스크 사업을 하기 위해서다. 미세먼지 공포가 커졌지만 성능과 디자인을 모두 갖춘 마스크는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카버코리아 매각 후 한동안 은둔했던 이 회장이 경영재개에 나섰다는 점에서 업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거부들의 패밀리오피스 설립 붐
패밀리오피스는 1882년 석유왕 록펠러가 만든 '록펠러 패밀리오피스'에서 유래했다.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 가문을 비롯해 케네디, 빌게이츠 등 유명 가문은 대부분 패밀리오피스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상위 3000개 패밀리오피스의 운영자금이 1조2000억 달러(약 1350조원)에 달한다.
국내에서도 대형 증권사·보험사 등이 자산가들의 자금을 맡아 운영하는 ‘멀티 패밀리오피스’를 선보이는 등 시장이 커지는 추세다.
국내 패밀리오피스의 원조는 이민주 에이티넘파트너스 회장이다. 그는 케이블TV 회사 딜라이브(옛 씨앤엠)를 팔아 1조원대 거부 반열에 올랐다. 이후 투자회사 에이티넘파트너스를 만들어 전문투자자로 변신했다. 에이티넘은 벤처기업과 자원 분야에 활발히 투자하면서 투자업계의 큰 손으로 자리매김했다. 한섬을 매각한 정재봉 사장이 세운 개인투자회사 한섬피앤디, 큐릭스를 매각한 원재연 회장이 설립한 제니타스, 박은관 시몬느 회장의 시몬느인베스트도 패밀리오피스로 분류된다.
김정주 넥슨 회장도 넥슨 매각을 추진하면서 본격적인 투자자로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김 회장은 유럽 내 투자회사인 NXMH를 통해 명품 유모차 브랜드 ‘스토케’와 레고 거래 사이트인 ‘블랙 링크’를 사들였다. 그는 국내 패밀리오피스를 통해 자금을 운영하는 방안도 구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최근 2020년 은퇴한 뒤 투자활동에 나서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국민 게임 ‘애니팡’으로 유명한 선데이토즈를 팔아 부호가 된 이정웅 대표도 최근 패밀리오피스 설립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가문의 자금을 운용하는 패밀리오피스와는 다르지만 젊은 거부들이 투자회사를 세워 벤처 육성에 나서는 경우도 늘고 있다. 게임 배틀그라운드로 유명한 크래프톤의 장병규 의장은 투자회사 본엔젤스를 세워 스타트업들의 초기자금을 대고 있다. 배달앱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며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으로 성장한 우아한형제들이 이 회사의 투자를 받았다.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인 이재웅 쏘카 대표가 자본금 200억원을 넣어 만든 투자회사 옐로우독도 있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뭉칫돈을 손에 쥔 거부들이 신(新)성장 산업에 돈을 대면서 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에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