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기수문화'에 갇힌 법원

신연수 지식사회부 기자 sys@hankyung.com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출신 판사를 사법연수원 몇 기에 편입시켜야 할지를 놓고 법원 내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로스쿨 1기를 법조 경력이 10개월 짧은 연수원 42기와 동기로 대우하겠다는 법원이 생기자 전국 로스쿨 출신 판사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당사자들 처지에서 생각하면 사법시험 출신과 로스쿨 출신 간 대결 의식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법조계는 서열이 분명한 조직이어서다. 법원에서는 부장판사와 두 배석판사가 참여하는 합의부 재판에서 부장판사를 중심으로 왼쪽에 앉느냐, 오른쪽에 앉느냐는 기수로 결정된다. 단독이나 합의부 재판장을 맡는 순서도 기수가 절대적 영향을 끼친다. 법원 주차장 자리가 부족할 때는 기수 순서대로 주차권을 나눠준다.하지만 사법 불신이 나날이 심각해지는 와중에 고작 몇 개월 차이로 선후배를 따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여론은 싸늘하기만 하다. 이른바 ‘연수원 기수문화’가 한국 법조계에 남긴 부작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재판에서 연수원 동기인 판사와 변호사가 만나면 공정한 심리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재판부를 재배당할 정도다. 연수원에서 2년간 동문수학하며 갖게 된 친분이 재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폐쇄적 기수문화가 사법부 위기를 초래한 요인 중 하나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재조·재야를 불문하고 동기 간 ‘우리가 남이가’식 풍토나 선후배 간 상명하복 구조가 전관예우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도 결국 근본적으로는 연수원 기수를 매개로 법조계에 만연한 동류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란 뼈아픈 지적이 곳곳에서 들린다.

이를 해결하고자 도입한 게 로스쿨이었다. 도입 취지를 잊어버리고 로스쿨에까지 기수를 부여하려는 법원과 판사들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독립된 사법기관으로 일하는 판사들에게 굳이 기수 구분이 필요한지도 의문이다. 무조건 줄부터 세우고 보려는 관행을 깨고 나올 때다. 국민들이 신뢰하는 판사는 기수가 높은 판사가 아니라 공정하고 충실하게 재판하는 판사라는 걸 법원은 잠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