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좌우 대결'로 번진 혼돈의 베네수엘라

美·브라질·칠레 "과이도가 임시 대통령" vs 러·멕시코·쿠바 "마두로 지지"

극심한 경제난·불공정 선거 의혹…카라카스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
트럼프 "정권 퇴진" 요구에, 마두로 "美 외교관 떠나라"
한때 중남미 맹주로 군림했던 베네수엘라가 극심한 경제난에 이어 예측불허의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13일 만에 거센 퇴진 시위에 휘말렸다. 야당 지도자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35)은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임시 대통령’을 자처하고 나섰다. 여기에 미국과 중남미 우파 국가들은 ‘마두로 퇴진’을, 러시아와 중남미 좌파 국가들은 ‘마두로 지지’를 선언하면서 베네수엘라 사태가 글로벌 좌우 대결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미국 “정권 퇴진” vs 마두로 “외교 단절”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선 23일(현지시간) 대규모 반정부 시위와 친정부 맞불 시위가 함께 벌어져 국정이 사실상 마비됐다.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과이도 의장은 “오늘 나는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서 행정권력을 공식적으로 행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과이도 의장은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미 조지워싱턴대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아 친미 성향 인사로 분류된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즉각 “과이도 의장을 베네수엘라의 합법적인 대통령으로 인정한다”는 성명을 냈다. 유럽연합(EU)도 “국민의 목소리가 무시될 수 없다”며 재선거를 촉구했다. 브라질 칠레 페루 파라과이 콜롬비아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등 중남미 우파 정권들도 ‘과이도 지지’ 입장을 밝혔다.

반면 마두로 대통령은 반정부 시위를 ‘미국의 음모’로 규정하고 “제국주의 미국 정부와 정치·외교관계를 끊겠다”고 밝혔다. 미 외교관들에게 “72시간 내 떠나라”고 최후통첩을 했다. 미 국무부는 “마두로에겐 그럴 권한이 없다”고 거부했다.

베네수엘라 군부는 과이도 의장의 임시 대통령 선언을 ‘불법’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러시아 크렘린궁과 외무부는 24일 성명을 통해 마두로 정권을 지지하고 나서 미국과 ‘파워 게임’에 돌입했다. 쿠바 멕시코 볼리비아 등 중남미 좌파 국가들도 ‘마두로 지키기’에 나섰다.베네수엘라의 정치적 혼란은 지난해 5월 대선에서 마두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 때부터 예고됐다. 당시 대선은 유력 야권 후보들이 가택연금, 수감 등으로 선거에 출마하지 못한 상황에서 치러졌다.

정치 혼란 뒤엔 포퓰리즘

베네수엘라 혼란의 배경엔 극심한 경제난이 깔려 있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때부터 시작된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과 좌파 정책으로 경제가 파탄났다.차베스 정권은 1998년 12월 대선에서 승리한 뒤 석유와 천연가스 자원을 국유화했다. 이후 석유를 판매해 확보한 재원으로 서민과 빈곤층에 무상으로 복지·의료·교육을 제공하는 사회주의 정책을 폈다. 2013년 차베스 사망 후 집권한 마두로 정권도 이 같은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마두로 대통령은 스스로를 ‘차비스타(차베스 신봉자)’라고 공언해왔다.

고유가 기간엔 ‘차베스표 정책’이 먹혔다. 베네수엘라는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중남미 맹주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배럴당 100달러가 넘던 국제 유가가 2014년 이후 고꾸라지면서 베네수엘라 경제도 함께 무너졌다.

베네수엘라 의회가 조사해 발표한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지난해 4만6300%에 달했다. 지난해 10월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이 1000만%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5%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을 피해 다른 나라로 떠난 베네수엘라인이 지금까지 33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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