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규제 앞장선 한국…블록체인 업체들, ICO 위해 '엑소더스'

Cover Story - 가상화폐의 무덤 된 한국

계좌실명제·ICO 금지 등 잇따른 정부 규제에 시장 '타격'
가상화폐 하루 거래량 작년초 10兆…올들어 5000억원대로 급감
가상화폐거래소·블록체인 기업들, 규제 피해 너도나도 외국으로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가상화폐(암호화폐)의 대표주자인 비트코인은 지난해 1월 7일 국내 거래소 기준으로 코인당 2600만원 근처까지 치솟았다. 금융위원회 등 한국 정부는 급히 움직였다. 다음날 긴급 브리핑을 열어 시중은행을 대상으로 가상화폐 계좌에 대해 합동검사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연일 상승 랠리를 이어가던 비트코인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금융위는 같은 달 23일 가상화폐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1주일 뒤인 30일부터 실명확인을 거친 새 가상계좌를 받은 투자자에게만 가상화폐 거래를 허용하겠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정부의 강경 방침에 가상화폐 시장은 빠르게 식었다. 덩달아 세계 가상화폐 시장도 얼어붙기 시작했다.

6분의 1 토막 난 비트코인
국내 가상화폐거래소 빗썸 기준으로 비트코인은 25일 코인당 390만원대에 거래됐다. 지난해 1월 초 2500만원 이상 치솟았던 것과 비교하면 6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비트코인 가격이 하락세를 면치 못하는 것은 가상화폐 시장에 유입되는 신규 자금이 크게 줄어든 데다 가격 상승을 주도할 대형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어서다.신규 자금을 말라붙게 한 결정타는 지난해 1월 30일부터 시행된 거래실명제다. 당시 정부는 명의 도용을 막고 투명한 금융거래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취지로 실명인증을 해야 새 가상계좌를 발급받을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 더욱이 은행들이 금융당국을 의식해 신규 계좌 발급을 꺼리면서 중소형 거래소는 은행과 새 가상계좌 발급 계약조차 맺지 못했다. 이렇다 보니 지난해 초 하루 최대 10조원에 달하던 국내 가상화폐 거래액은 올 들어 5000억원대로 급감했다.

정부는 당시 외국인들의 국내 거래소 투자도 전면 금지했다. 국내 가상화폐 시장에 대형 투자주체의 등장을 원천 차단했다는 뜻이다. 지난해 초 국내 거래소의 가상화폐 가격이 외국에 비해 높게 형성되는 ‘김치 프리미엄’이 발생한 것도 중국 등 외국에서 막대한 투자 자금이 유입됐기 때문이란 분석에서였다. 2017년 9월 중국 정부가 가상화폐거래소 운영을 전면 금지하자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비트코인을 갖고 있던 중국 투자자들은 비트코인을 한국에 대거 옮긴 것으로 전해졌다.
그래픽=이정희 기자 ljh9974@hankyung.com
외국으로 발길 돌리는 기업들정부 규제가 잇따르자 국내 가상화폐거래소들은 외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빗썸은 지난해 10월 홍콩에 빗썸덱스를 설립했다. 빗썸은 같은 달 의사 출신인 김병건 BK그룹 회장이 싱가포르에 설립한 BXA(블록체인거래소연합)에 팔렸다. 서류상 한국 기업이 아니라 싱가포르 기업이라는 뜻이다. 빗썸은 싱가포르를 비롯한 12개 국가에 신규 거래소를 세우는 계획을 짜고 있다.

가상화폐거래소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도 지난해 10월 싱가포르에 ‘업비트 싱가포르’ 거래소를 공식 개설했다. 두나무는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다른 국가에 적극 진출한다는 방침이다. 코인원은 지난해 8월 인도네시아 현지 기업들과 함께 코인원인도네시아를 설립하는 등 해외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

거래소뿐 아니라 정부의 가상화폐공개(ICO) 불허 방침으로 국내 블록체인 업체들은 ICO를 외국에서 추진하고 있다. ICO는 기업이 사업계획서를 공개하고 가상화폐를 발행해 투자자에게 판매하는 방식으로 사업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다. 지난해에만 베잔트, 브릴리언트, 얍체인 등의 블록체인 업체가 홍콩과 싱가포르 등 ICO를 허용하는 국가에서 투자금을 모았다.국내에 ICO 관련 법적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ICO를 금지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금융위는 2017년 9월 ICO를 앞세워 투자를 유도하는 사기 등으로 소비자 피해 확대가 우려돼 ICO를 금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후 ICO를 금지하는 법률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방침이 워낙 강하다 보니 관련 기업 모두 국내를 피하고 있다.

정부의 태도는 완강하다. 지난해부터 해외 ICO 실태를 조사하고 있지만 단순 참고용이라는 게 금융위의 설명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10월 “가상화폐는 사기의 근원이며, 블록체인은 역사상 가장 과장된 기술”이라는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ICO 허용에 반대한다는 뜻을 재차 밝혔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